북극성은 천구의 북극 가까이에 있으며 위치가 거의 변하지 않는 별이다. 현재 북극성은 하늘의 북극에서 약 1°가량 떨어져 있다. 예로부터 북쪽 방위를 찾는 길잡이 구실을 해왔다. 북극성이 속해 있는 별자리는 작은곰자리로 우리나라에서 3월에 북두칠성과 함께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우리나라 북극고도의 측정에 대한 기록은 『원사』 역지(曆志) 수시력에서부터 나타난다. 1791년(정조 15)에는 한양의 북극고도를 기준으로 팔도여도를 써서 각 관찰영의 북극 고도값을 얻었다. 북극성의 위치는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현재 북극성은 하늘의 북극에서 약 1°가량 떨어져 있지만, 지구의 세차운동 때문에 북극성의 위치는 조금씩 달라지고 수백 년 후에는 북극성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하늘의 북극 위치에서 많이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북극성은 하늘의 북극 가까이에 있어 예로부터 북쪽 방위를 찾는 길잡이 구실을 해왔다. 북극성이 속해 있는 별자리는 작은곰자리로, 이 별자리는 우리나라의 3월에 북두칠성과 함께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된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북신(北辰) · 북성(北星) · 중극(中極) 등으로 불리던 북극성은 사계(四季)를 바로잡고 기후변화를 주관하는 신으로 섬겼다. 이 별은 태자(太子) · 제성(帝星) · 서자(庶子) · 후궁(後宮) · 천추(天樞)의 다섯 별과 함께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중심이 되고 위대한 별이기 때문에 다른 별들의 옹위를 받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도 북극성이 인격신으로 나타나는 예를 볼 수 있는데, 동해안 지방에 전승되는 무가(巫歌) 바리데기신화에서는 주인공 바리데기가 죽어서 북극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북극성을 신앙화한 의례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지구의 자전운동 때문에 하늘의 북극을 중심으로 모든 항성(恒星)이 시계바늘과 반대방향으로 1일 주기 회전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항성일주운동의 중심점의 위치, 즉 북쪽 하늘의 지평선에서부터 북극의 높이를 북극고도(北極高度)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북극성이 관찰지점에서의 북극고도를 측정하는 기준점이 되었다. 이러한 북극고도는 그 지점의 위도(緯度)에 해당되며 오래 전부터 오늘날의 위도 대신 사용되었는데, 그 지방의 밤낮의 길이, 해의 출입시각을 계산하는 기초가 되며 물시계에서 밤 사이의 경각(更刻)을 정하는 데 필요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북극고도의 측정에 대한 기록은 『원사(元史)』 역지(曆志) 수시력(授時曆)에서부터 나타난다. 즉, “고려극고(高麗極高) 38도(度) 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도수법으로는 원주(圓周)를 365° 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서양의 360°법으로 환산하면 37°41′이 된다. 이것은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松都), 즉 개성의 위도 측정값으로 해석된다.
『관상감일기(觀象監日記)』에서는 조선시대 세종 때 역관(曆官) 윤사웅(尹士雄) · 최천구(崔天衢) · 이무림(李茂林)을 각각 강화부(江華府)의 마니봉, 갑산부(甲山府)의 백두산, 제주목(濟州牧)의 한라산에 파견해서 그 곳의 북극고도를 측정했다고 하나 측정값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1713년(숙종 39) 계사(癸巳)에는 청사(淸使) 목극등(穆克登)이 5명의 사력(司曆)을 거느리고 와서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의 북극고도를 측정했다고 하는데, 실측자는 하국주(何國柱)로서 종가(鍾街)에서 상한대의(象限大儀)를 가지고 측정하여 37°39′15″의 값을 얻었다. 매각성(梅殼成)이 편찬한 『역상고성(曆象考成)』에 이 실측값이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한양에서 남쪽으로 약 1,000리 떨어진 해남현(海南縣)의 북극고도는 한양의 북극고도보다 2∼3° 낮고, 북쪽으로 거의 2,000리 떨어진 삼수부(三水府)는 한양보다 4∼5° 높다고 기록되어 있다.
1791년(정조 15) 신해(辛亥)에는 한양의 북극고도를 기준으로 하고 팔도여도(八道輿圖)를 써서 각 관찰영(觀察營)의 북극고도값을 얻었다. 그리고 관북(關北)은 40°57′, 관서(關西)는 39°33′, 해서(海西)는 38°18′, 관동(關東)은 37°06′, 호서(湖西)는 36°06′, 영남(嶺南)은 35°21′, 호남(湖南)은 35°15′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