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산이다.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라는 뜻에서 머리산 또는 마리산으로도 불린다. 본래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이었는데, 강화도와 둑으로 연결되면서 한 섬이 되었다고 한다. 산 정상에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를 지내기 위하여 설치하였다는 참성단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를 올렸다고 한다. 현재 성역(聖域)으로 보호되어 있으며 매년 개천절에는 제전이 올려진다. 1953년 이후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매년 채화(採火)하고 있다.
높이는 472.1m이다. 마니산은 강화도 서남단에 있으며 강화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의 정상에서 남쪽의 한라산과 북쪽의 백두산의 중앙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마니산은 마리산 또는 머리산으로도 불린다. 마리란 고어(古語)로 머리를 뜻하며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땅의 머리를 의미한다. 더우기 산 정상에는 하늘에 제를 지내는 단이 있어 강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 민족, 전 국토의 머리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마리산(摩利山)으로 되어 있고, 그 후 마니산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을 북동에서 남서로 달리는 마식령산맥은 서남단인 강화도에 이르러 차례로 고려산(高麗山) · 혈구산(穴口山) · 진강산(鎭江山) · 마니산 등의 산을 형성하였다. 이들 산은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 형성된 낮은 구릉성 산지의 잔구(殘丘)이다.
마니산은 본래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으로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는데, 강화도의 가릉포(嘉陵浦)와 고가도의 선두포(船頭浦)를 둑으로 연결하면서 강화도와 한 섬이 되었다고 한다. 과거 북쪽 양도면의 진강산과 동쪽 길상면의 길상산(吉祥山)은 마니산과 얕은 바다를 경계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는 과거의 지질시대에 지각 변동이나 해수면 승강운동이 조금만 일어나도 섬이 되었거나 육지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높음을 시사한다.
마니산 일대에는 선캄브리아기의 변성암 계일인 편암과 편마암이 넓게 분포하며 이른바 마니산 화강암으로 지칭되는 중생대 대보화강암이 존재한다.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북쪽 기슭에는 굳은 화강암 암반이 넓게 깔려 있는 곳이 있고, 등산로 양쪽의 노두(露頭)에서는 심하게 풍화되어 부스러지는 새프롤라이트(saprolite)와 암석 표면이 양파 껍질같이 떨어지는 박리현상(剝離現象)을 관찰할 수 있다. 또 거대한 화강암의 판상절리(板狀節理)가 곳곳에서 나타나며, 경사가 심한 산정 부근에는 화강암의 기암절벽이 솟아 있다.
산정에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를 지내기 위하여 설치하였다는 높이 5m의 참성단(사적, 1964년 지정)이 있다. 참성단은 자연석을 쌓은 것인데, 기단(基壇)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의 네모꼴로 되어 있다. 이 단의 축조연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4,000년이 넘는 유물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그 위치나 구조로 보아 천문대나 관상대와 비슷하기 때문에 후세에 와서 이러한 용도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를 올렸다고 한다. 단역에는 수천 년 동안 계속 수축된 흔적이 있다. 정확한 수축 기록은 1639년(인조 17)과 1700년(숙종 26)에 남아 있다. 현재 마니산은 성역(聖域)으로 보호되어 있으며 매년 개천절에는 제전이 올려진다. 그리고 1953년 이후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매년 채화(採火)하고 있다.
마니산 산록에는 고려시대부터 형성된 여러 촌락이 있다. 북사면의 내리 · 문산리 · 상방리는 마니산을 오르는 입구에 있고, 동사면에는 사기리, 남사면에는 흥왕리, 서사면에는 장화리 등이 있다. 사기리는 지명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려 분청사기의 가마터가 발견된 곳이고, 남쪽의 흥왕리에서는 몽골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지은 이궁(離宮)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정수사(淨水寺)는 신라 선덕여왕 때 개산(開山)한 고찰로 마니산 동봉(東峰) 중복에 자리잡고 있다. 또 마니산 서남사면에 위치한 북일장(北一場)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마목장 중 한 곳이었다.
강화도는 고려의 개경은 물론 조선의 한양과도 가까웠고, 섬이었던 관계로 여러 차례 천도(遷都)와 몽진(蒙塵)의 땅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화도 곳곳에 진보(鎭堡)와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는데,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진보가 12개, 돈대가 53개나 되었다. 특히 마니산은 삼면이 바다와 접해 있어 주변 해안에 진보나 돈대 유적이 많다. 마니산의 서북단에는 숙종 때 만들어진 장곶보(長串堡)가 있고, 서쪽으로부터 검암돈대 · 미루돈대 · 동막돈대 · 분오리돈대 · 칠오지돈대 등이 있다.
한편 마니산 주변 해안에서는 일찍부터 방축(防築)을 쌓아 농경지를 간척하였다. 마니산 서북쪽에 위치한 내리(內里)의 가곶보와 1664년(헌종 5)에 강화도의 가릉포와 고가도의 선두포를 연결하는 선두포 둑을 쌓았다는 기록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마니산 남쪽 해안은 근대적인 간척사업으로 경지를 넓혀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대표적인 지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