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

경주 신라 선덕여왕릉 정측면
경주 신라 선덕여왕릉 정측면
고대사
인물
신라의 제27대(재위: 632년~647년) 왕.
이칭
이칭
덕만(德曼), 덕만공주(德曼公主), 선덕왕(善德王),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647년(선덕여왕 16)
출생지
신라
주요 관직
신라 제27대 국왕(재위: 632∼647년)
관련 사건
비담과 염종의 난|칠숙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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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선덕여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32~647년이며, 진평왕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했다.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당과 연합하여 국가를 보존하려 했고, 백제의 침략으로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이 함락되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에 유학 중이던 자장을 귀국시켜 불교사상을 왕권강화책으로 적극 활용했고, 호국 중심 사찰인 황룡사에 왕권의 상징물로 구층목탑을 건립했다. 비담 등 진골 귀족들의 반란 와중에 재위 16년 만에 죽었다.

정의
신라의 제27대(재위: 632년~647년) 왕.
개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의 장녀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 성골(聖骨)’이라는 특수한 왕족 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즉위하던 해인 632년(선덕여왕 1)에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백성들을 진휼(賑恤)했으며, 633년에는 주(州) · 군(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中古) 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다만, 즉위 이후 거의 매년 당나라에 조공 사신을 파견하여 당나라와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이것은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신라는 642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그 해에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 성을 빼앗겼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도 고구려 · 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 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당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로 임명해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하였다.

또한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자장(慈藏)에게 귀국요청을 하였다. 자장은 귀국 후 선덕여왕과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가며 정치권에 깊숙이 개입하여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자장은 불교사상을 왕권강화책으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여왕의 권위와 통치력에 새로운 위상을 정립시켰다. 그 권위의 상징물로 호국 중심 사찰인 황룡사(皇龍寺)에 645년(선덕여왕 14)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을 건립하였다. 황룡사구층목탑은 높이 80m에 달하는 거대한 불탑이었다. 또한 자장은 신라가 과거세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유연불국토(有緣佛國土)’라고 하며 강원도 오대산문수보살(文殊菩薩)의 상주처로 설정해 신라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과 호국사상을 일치시켜 불력과 통합된 정치력으로 신라 왕실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당 태종(太宗)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권위가 없어 고구려 · 백제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편 고구려에 대해서는 644년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적 견제를 가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당 태종이 지적한 여왕 통치의 문제점은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1월에는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염종(廉宗)진골(眞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이 이를 진압했으며, 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었다.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주보돈,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1994)
「신라 선덕왕대의 정국동향과 비담의 난」(정용숙,『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1994)
「한국 고대 여성의 지위」(김두진, 『한국사시민강좌』15, 1994)
「‘선덕여왕지기삼사’조 설화의 연구」(강재철, 『동양학』2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1)
「신라 내물왕계의 혈연의식」(이기동,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자장의 불교사상에 대한 재검토-신라불교 초기계율의 의의-」(신종원, 『한국사연구』39, 1982)
「상대등고」(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新羅政治體制の變遷過程-門閥貴族の集團支配と專制王權-」(井上秀雄,『古代史講座』4, 學生社,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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