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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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낙산사 홍련암 정측면
양양 낙산사 홍련암 정측면
불교
개념
이 땅이 곧 불국토라고 여기는 불교교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불국토사상은 이 땅이 곧 불국토라고 여기는 불교 교리이다. 신라에 불교가 도입될 당시에 불교를 수용하는 주체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불교 수용에 장애가 있었다. 이에 신라불교는 신라인들의 고유한 산악숭배를 불교적으로 윤색하였다. 나아가서 이 신라라는 땅이 본래 불국토(佛國土)였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의상이 동해안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건립한 설화, 불국토관을 조형적으로 나타낸 사방불(四方佛), 불국토 사상을 표방하여 창건한 불국사 등은 신라인의 불국토사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목차
정의
이 땅이 곧 불국토라고 여기는 불교교리.
내용

불교의 수용과정을 살펴보면 삼국 가운데 불교의 공인이 가장 늦은 나라는 신라였다. 고구려백제의 경우에는 왕실에서 먼저 불교를 받아들여 그것이 점차 확고한 민간신앙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므로 불교수용에 따른 별다른 저항이나 반발이 없었다.

신라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고구려나 백제와 거의 동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불교의 공인에 있어서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초래하게 된 원인은 첫째 신라의 왕권이 확립되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법흥왕 이전까지의 신라왕권은 사실상 육촌장(六村長)을 중심으로 한 씨족적 민간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볼 때 불교를 수용하는 주체세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둘째는 민속신앙(民俗信仰)과의 갈등을 들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교를 반대하는 이유로서 ‘어린아이 같은 머리를 하고 이상한 복장을 하며[童頭異服], 고래(古來)의 믿음과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언급이 있다. 즉, 샤머니즘적 원시신앙이 불교수용에 장애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신라사회의 폐쇄성으로 위치가 반도의 남쪽에 있다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그 당시 내륙의 문화첨단이라 할 수 있는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527년(법흥왕 14) 불교가 공인된 뒤, 그것이 국교(國敎)로서 정착하기까지 신라불교는 필연적으로 남다른 우여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라불교가 당면한 근원적 과제는 불교가 외래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고유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신념의 제시였다. 나아가서 이 신라라는 땅이 본래 불국토(佛國土)였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불국토사상은 급기야는 불교를 우리의 종교라고 하는 주장으로 발전시켰고, 그것은 신라불교의 토착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가섭불(迦葉佛)이 황룡사(皇龍寺)에서 설법하였다거나 신라땅에 전불시대(前佛時代:석가모니불 이전의 부처가 있던 시대)의 가람이 있었다거나, 아쇼카왕(Asoka王)이 만들다가 실패했던 불상이 인연 있는 땅 신라에서 드디어 완성을 보았다는 등의 설화가 그것을 대변한다. 즉, 신라땅이 불교와 낯선 무관한 곳이 아니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상징성을 내포하는 설화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명산의 봉우리마다에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가 붙여지고, 그곳에 사찰을 건립하게 된 것 등도 모두 신라인 특유의 산악숭배가 불교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 현상이다. 고신앙(古信仰)이 산을 숭배하고 돌을 중요시할 때, 불교도 또한 같은 입장에 섬으로써 불교는 서서히 신라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초기 불국토사상의 선봉이 된 것은 자장(慈藏)을 비롯한 구법승(求法僧)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고유한 산악숭배를 불교적으로 윤색하는 사상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다음 단계로는 원효(元曉)의상(義湘)을 비롯한 뛰어난 사상가들에 의해 도입된 불국토관(佛國土觀)이다. 이것은 이 땅을 불국토로 믿음과 동시에, 그렇지 못한 현실을 불국토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사상성을 지니고 있다.

그 이론의 뒷받침이 된 것은 『화엄경』이었고, 그것을 최초로 정착시킨 인물은 의상이었다. 의상은 이 세계의 실상(實相)을 보이지 않는 영원(永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현현(顯現)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법신(法身)에 의하여 생멸(生滅)하는 세계의 실상을 가르침으로써, 신라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심화시켰던 것이다.

신라 불국토사상의 전개에는 자장을 비롯한 초기 구법승들의 활약이 컸다. 자장이 입당구법(入唐求法)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643년(선덕여왕 12)이다. 그때 1,300여 권의 경론(經論)과 불사리(佛舍利)가 수입되는데, 그것은 불교를 교학적(敎學的)인 입장에서 고양시킬 수 있는 큰 전기가 되었다. 특히 금강산 법기보살(法起菩薩)에 관한 신앙은 맹목적이었던 산천에 대한 믿음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게 되었다.

오대산신앙을 이식(移植)시킨 인물은 자장이었지만, 실제로 이 산을 신비화시킨 것은 정신대왕(淨神大王)과 두 태자였던 보천(寶川) · 효명(孝明)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태자 두 사람은 속세를 버릴 뜻을 품고 암자를 지어 오대산에 머물렀는데, 그들은 여기서 오봉(五峰)을 첨례(瞻禮)하고 그 안에 있는 오만(五萬)의 진신(眞身)을 보았으며, 그 36가지로 변화하는 모습을 친견할 수 있었다.

보천에 의하면 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는 진신이 상주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오대란 동서남북의 사방에 중앙을 합하여 부른 것이다. 그리고 각 대마다 방(房) · 당(堂)을 설치하고 그 안에 청(靑) · 적(赤) · 백(白) · 흑(黑) · 황(黃)의 색깔을 배정하여 별개의 불보살을 그려 봉안하였다. 신도들은 이곳에서 신행결사(信行結社)를 통해 낮에는 경을 독송하고 밤에는 예참(禮懺)을 행하였던 것이다. 오대산의 신행(信行)내용은 〈표〉와 같다.

臺名 寺名
(주존)
禮法 結社名 山名
東臺 觀音房
(관음보살)
청색 金經·仁王般若經·千手經 圓通社 滿月山
觀音禮懺
西臺 彌陀房
(무량수불)
백색 八卷 法華經 水精社 長嶺山
彌陀禮懺
南臺 地藏房
(지장보살)
적색 地藏經·金剛般若經 金剛社 麒麟山
占察禮懺
北臺 羅漢堂
(석가모니불)
흑색 佛報恩經·涅槃經 白蓮社 象王山
涅槃禮懺
中臺 眞如房
(비로자나불)
황색 華嚴·六百般若 法輪社 風盧山
文殊禮懺
〈표〉 오대사신앙의 신행 내용

이것은 물론 방위신앙(方位信仰)과도 깊은 관련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도(道) · 불(佛) 습합의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방위(四方位)에 불보살을 배림하는 것은 역시 그곳에 위치하는 불보살에 대한 강한 믿음이 뒷받침될 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사방불신앙을 통해서 더욱 보편화된다.

신라인들에게는 오악(五岳) · 삼산(三山)에 관한 고유한 신앙흔적이 있었다. 그것이 불국토사상의 대두와 함께 다양한 변천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즉, 산천에 관한 원시신앙이 불교적으로 윤색되고 변모하는 그 구체적 실례가 바로 자장에 의하여 도입된 이 오대산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자장은 황룡사구층탑을 건립하게 된 연기(緣起)에서와 같이, 당시의 신라사회를 좀더 사상적인 면에서 고양시켜야 한다는 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 오대산신앙의 이식은 신라인들에게 자부와 긍지를 느끼게 한 믿음이었으며, 그 믿음의 도입이야말로 자장의 사상사적 업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 불국토사상은 몇 가지 실례를 들어 그 의의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전불가람지(前佛伽藍址)에 대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서울에는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일곱 개의 가람터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일곱 가람터 가운데 하나인 월성(月城) 동쪽, 용궁 남쪽에 황룡사가 세워졌다. 그 황룡사에는 가섭불이 설법하던 연좌석(宴坐石)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가람에 신성성(神聖性)을 부여하기 위한 조작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그것들이 뜻하는 상징성의 문제에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진흥왕이 불상의 조성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진흥왕 때 남해에 큰 배 한 척이 떠왔다. 그 배에는 황금과 철이 가득 있었고, 서축(西竺)의 아육왕(阿育王:아쇼카왕)이 보낸 편지가 있었다. 석가삼존상을 만들려다 실패하였으니 인연 있는 땅에 가서 성공하기를 비는 내용이었다. 그 재료를 서라벌로 옮겨 573년(진흥왕 34)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이룩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의상의 낙산사(洛山寺) 창건을 들 수 있다. 의상은 입당구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하여 동해변을 참배하였다. 끝내 관음을 보지 못하자 의상은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때 홍련(紅蓮)이 바다 속에서 피어나며 의상을 건지고, 그 안에 나타난 관음보살이 수정염주(水晶念珠)를 주면서 의상의 높은 신심을 찬양하였다. 의상은 낙산사를 창건하고, 관음진신의 가르침대로 산 위에 전당을 짓고 관음소상(觀音塑像)을 모셨다.

이상에서 보는 세 가지 설화는 불교가 신라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는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즉, 이 땅이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신라인들에게 불어넣음으로써, 자부심을 갖고 불교에 귀의하게끔 하는 중요한 정지작업의 구실을 하게 된다. 그 결과 국명 자체에까지 불교성지의 이름을 써서 실라벌(實羅伐)이라고 표기하여 서라벌의 어원을 이룬다.

이것은 불교발상지와의 관련을 염두에 둔 끈질긴 시도의 한 전형으로, 이와 같은 시도는 이를테면 불교 초전기(初傳期)의 제1단계적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을 좀더 사변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금강산신앙과 오대산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제1단계에서 직접적이고 물적인 연관을 강조한다고 하면, 제2단계에서는 그 직접적 연관을 인정하되 그것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떤 직접적 계기 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상성을 띠게 된 데에는 『화엄경』의 법계연기사상(法界緣起思想)을 비롯한 대승불교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상성의 고양에 헌신한 사람으로는 원효 · 의상 등을 들 수 있다.

오대산신앙과는 별도로 산과 관련된 신라의 불국토관에는 금강산을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주처(住處)라고 믿는 사고방식이 있었다. 어느 때부터 이와 같은 사상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8세기 후반에는 그것이 확고하게 인식되기 시작한 듯하다. 특히, 의상의 제자였던 표훈(表訓)이 금강산에 표훈사를 건립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금강산신앙은 80권 『화엄경』의 번역 직후인 8세기 전반부터 우리나라에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80권 『화엄경』에는 법기보살의 주처인 금강산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언급은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80권 『화엄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제32에 의하면 방위별로 산명을 열거하고, 예로부터 여러 보살들이 거기에 머물러 살았음을 밝혔다. 그리고 현재에는 어느 보살이 권속(眷屬) 얼마를 거느리고 법(法)을 설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민화 금강산도(金剛山圖)에 의하면 1만2000봉의 봉우리를 모두 사람으로 표현한 수법이 있는데, 이와 같은 사례와 사상성의 배경은 역시 8세기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리고 이 금강산에 관한 신앙은 암석숭배(岩石崇拜)와 습합함으로써 그 이명(異名)을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부르는 습관까지 낳게 된 것이다.

의상이 낙산사를 창건하게 된 연기설화는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동해변을 찾았고, 불가사의한 영험에 의하여 관음보살을 만났다는 것으로 그때 원효가 이 소식을 듣고 낙산사를 찾아왔다. 그 도중에 그 또한 대성(大聖)들을 친견했다고 하였다.

한국불교사를 통하여 볼 때 의상은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지어 이 땅에 화엄의 가르침을 편 해동화엄(海東華嚴)의 초조(初祖)라는 큰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가 관음보살을 동해변에서 만났다는 영험담은 다음과 같은 상징을 내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첫째, 낙산 해변굴(海邊窟) 안에 관음이 계시다는 믿음의 유포로 이 낙산에 거주하는 관음은 신라의 관음이라는 것이다. 불경에서 가리키는 대로 남염부제(南閻浮提), 즉 어느 곳에 떨어진 상징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리 땅 신라에 현신(現身)한다는 믿음이 이 설화의 중요한 모티프인 셈이다.

둘째, 그 사명(寺名)에 있어서 낙산(洛山)이라는 명칭이 지니는 상징이다. 그것은 서역(西域)에서 관음의 도량으로 믿어지는 포탈라카(potalaka)의 음역이다. 이것을 보타락가(補陀洛迦)라고 썼고, 다시 보타라는 글자가 생략됨으로써 낙가 또는 낙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즉, 관음보살의 주처(住處)가 낯설고 먼 땅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고장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으로 신라의 땅에 관음도량을 설정하고, 그것을 이 땅에 정착시킨 설화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즉, 소박한 산악숭배를 불교적인 윤색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초기 불국토사상의 특징이었다고 한다면, 의상의 낙산사 창건은 그것을 실증하는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 소식을 듣고 원효가 이 절을 참배한다는 줄거리도 하나의 상징일 수 있다. 그 당시 최고의 석학이었던 의상에 의하여 개창(開創)된 이 절을 가장 고덕(高德)한 인물로 꼽힐 수 있는 원효가 참배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의상의 낙산사 창건은 경전의 뒷받침이 있을 때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의상이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하여 동해변에 오는 것은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그 연원을 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즉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이나 『무량수경(無量壽經)』 등 관음보살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승경론들 속에는 이와 같은 구도를 향한 편력의 노정이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구법행각(求法行脚)이 주제를 이루고 있다. 즉 선재동자가 53선지식(善知識)을 역방하던 중 남해 보타락가산으로 관음보살을 찾아가 친견하고 무상(無上)의 설법을 들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와 같은 믿음에 의거하여 의상은 동해를 찾았던 것이며, 그 깊은 신심의 결과 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설화의 상징이다.

따라서 이 설화는 초기의 불국토사상이 가진 신념에 더욱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는 제2단계의 불국토사상이었다. 즉, 의상은 이 땅에 『화엄경』의 가르침을 홍포한 인물일 뿐 아니라, 그것을 불국토사상으로까지 발전시킨 불교토착화의 주역이었다. 그리고 화엄신앙과 관음신앙 등 다소 이질적인 사상경향을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불설(佛說)을 원융(圓融)하게 이해하려던 신라불교의 일승적(一乘的)인 사상풍토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자력과 타력을 조화시킨 승화된 믿음이었고, 나아가서 이와 같은 풍토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신라불교의 특질은 융섭적(融攝的)인 통화불교(統和佛敎)의 전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일승적 이상향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사상성을 선호하는 신라불교의 특징적 면모가 의상의 낙산사 창건연기를 통하여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뚜렷하게 불국토사상을 표방하는 사원의 예로서는 불국사가 있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불국사는 김대성(金大城)이 창건한 것이 아니라, 법흥왕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의 이름은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 · 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라고 하였고, 그 뒤 의상과 그의 제자 오진(悟眞) · 표훈(表訓) 등이 무설전(無說殿)에서 『화엄경』을 강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초기 불국토관이 주술적 경향이었던 것을 화엄의 세계관에 의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한 실례가 될 것이다. 즉, 『화엄경』의 주제라고 말할 수 있는 삼계허망단일심작(三界虛妄但一心作)에 의하면, 불국토를 만드는 것은 일심(一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을 전불시대의 가람터로 이해하는 것이 초기 불국토사상의 특징이라면, 『화엄경』에 의한 불국토사상은 고통의 현실을 불국으로 화현(化現)시키려는 의지로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원효나 의상 같은 사상가들은 차원높은 불국토관을 실현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불국토관을 조형적으로 나타낸 전형이 바로 사방불(四方佛)이다.

오대산신앙의 경우 그 오봉(五峰)은 동쪽에 관음보살, 남쪽에 지장보살, 서쪽에 아미타불, 북쪽에 석가모니불, 중앙에 비로자나불의 진신(眞身)이 머무르는 곳으로 보았다. 이것은 이미 지적한 대로 불교도입 이전부터 신라인들이 가졌던 오악숭배의 전통과 용이하게 습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징적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와 같은 사방불뿐 아니라 석탑의 기단에 조성하는 사방불 역시 이와 같은 정신을 반영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석탑에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사방위에만 조형 또는 조상을 할 수 있다. 석탑에 있어서의 중심은 불사리(佛舍利)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깥은 사방불이지만, 그 안의 보이지 않는 곳은 법신불(法身佛), 즉 비로자나불을 상징적으로 내포한 하나의 불세계(佛世界)가 표현되는 것이다.

사료(史料)에 나타난 사방불에 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에 관한 기록이다. 즉, 죽령(竹嶺) 동쪽 약 100리쯤에 높은 산이 있는데, 587년(진평왕 9)에 별안간 사면이 방장(方丈)만하고 사방에 여래(如來)가 새겨진 큰 돌이 하늘로부터 산정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 사방여래는 홍사(紅紗)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친히 참례한 뒤,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고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법화경』을 외우는 한 비구(比丘)가 절을 지켰는데,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았다.

이 밖에 사방불의 유물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의 사면석불,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방불, 안강(安康) 전금곡사지(傳金谷寺址) 사방불, 경주시 동천동의 석탑 사방불, 국립경주박물관 사방불 5기(基), 경주경찰서 앞뜰 소재 석탑사방불 2기 등이 있다.

사방불의 배치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기보다는 그때 그때의 선호경향에 따른 배치가 특히 유행하는데, 그 전형적 예로는 동쪽에 약사여래(藥師如來), 남쪽에 미륵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쪽에 석가모니불을 안치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비로자나불의 사리를 중앙 · 중심으로 생각하는 화엄세계(華嚴世界)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엄경(華嚴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상징적표현을 통해서 본 7·8세기 신라 및 일본의 불국토사상」(이기영, 『한국불교연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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