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된 때에는 유점사(楡岾寺)의 말사였다. 금강산은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주처(住處)로서 표훈사의 동북쪽 가장 높은 봉우리는 법기진신(法起眞身)이라 일컬어지며, 이 절이 금강산 법기신앙(法起信仰)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675년( 문무왕 10) 표훈(表訓) · 능인(能仁) · 신림(神琳) 등이 신림사(神琳寺)로 창건하였고, 673년에 표훈사로 개칭하였다.
그 뒤 고려시대에 원나라 영종(英宗)과 태후 · 태자 등이 시주하여 크게 중창하고, 지정(至正) 연호가 새겨진 은문동로(銀文銅爐)와 향합(香盒) 등을 하사하였으며, 이 절을 중심으로 각종 법회와 반승(飯僧) 등을 베풀었다.
또한, 1408년( 태종 8)과 1427년(세종 9), 1432년에 창성(昌盛) · 백언(白彦) 등 명나라의 사신들이 금강산 유람 도중 이곳에 와서 반승회(飯僧會)를 개최하였다.
1424년 예조의 조사에 의하면 이 절은 승려 150명이 거주하였던 대찰이었으며, 나라에서도 기존의 밭 210결(結)에 90결을 더 내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중건 및 중수의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절의 본당은 다른 사찰과는 달리 반야보전(般若寶殿)이라 하였으며, 그 안에 『화엄경』의 법기보살 장륙상(丈六像)을 안치하였다.
그리고 불상을 법당 정면으로 모시지 않고 동쪽에 있는 법기진신봉으로 향하도록 안치하는 특수한 관례를 적용하였다. 또한 절 뒤의 법기봉에 대한 고유한 제사의식도 행해졌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 그 절차와 시기 등에 대해 밝힐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 당우로는 반야보전을 비롯해서 영산전 · 어실각(御室閣) · 산신각 · 능파루(凌波樓) · 판도방 등이 있다. 중요문화유산으로는 원나라 황실의 하사물 외에도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가사(袈裟)와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사리(舍利), 야보전 앞에 53불을 모신 철탑(鐵塔)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의하여 강탈당하고 말았다.
이 절 부근에는 경순왕비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을 간직한 돈도암(頓道庵)과 신라시대의 탑이 있는 신림암(神琳庵), 서산대사가 창건하였던 백화암지(白華庵址)가 있다. 또 절 안의 수충영각(酬忠影閣)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四溟大師)를 비롯하여 고려 말의 명승 지공(指空)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