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왕력(王曆)이나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아 신라의 제 몇 대, 어느 왕인지 분명하지 않다.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올 때 정신대왕의 태자인 보천(寶川) · 효명(孝明) 형제가 속세의 인연을 끊을 뜻을 가지고 서로 밀약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어버려, 각각 푸른 연꽃이 핀 곳에 암자를 짓고 거주하며 수도하였다. 정신대왕은 동생과 왕위를 다투었으므로, 국인들이 그를 폐하고 장군 4인을 보내 태자 형제를 맞이하려 하였다. 보천이 울면서 사양하자 효명을 받들고 돌아와 즉위시켰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여러 해가 되어 705년(성덕왕 4)에 진여원(眞女院)을 개창하였다.
그러나 일설에는 647년(진덕여왕 1)에 두 태자가 오대산에 들어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혼란된 기사에 대해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은 정신대왕을 신문왕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의 왕자 보천과 효명이 입산하였다가 그 중 효명이 즉위해 효소왕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진여원을 개창한 것은 성덕왕이어서, 효명은 성덕왕이 되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다만,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條)에는,
“정신태자 보질도(寶叱徒)가 동생인 효명태자와 더불어 오대산에 들어갔다.”
고 하여 보질도가 정신이며 왕으로 추대된 효명은 성덕왕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신문왕은 태자시절에 김흠돌(金欽突)의 딸을 비로 맞았으나 흠돌의 난으로 출궁되고, 재위 3년에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맞아 신목왕후(神穆王后)로 봉하였다. 효소왕은 신목왕후의 소생이지만 정신과 효명은 김흠돌의 딸의 소생이다. 이들 사이의 왕위쟁탈전을 반영하는 것이 오대산에 관한 설화를 만들게 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다만, 위의 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의 내용은 “정신의 태자 보질도와 그 동생인 효명”으로 해석되기도 하므로, 그렇게 되면 정신은 신문왕과 김흠돌의 딸 사이의 소생이 될 수 없다.
일연이 고증한 대로 정신대왕을 신문왕으로 보는 것이 당시에 자장의 사상 전통을 잇는 오대산신앙의 형성과 연관시켜 바람직할 수 있다. 오히려 정신대왕이 동생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다가 폐위되는 사실은 신문왕대 말의 정치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