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숭배는 산악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숭배하는 신앙 행위이다. 산은 지상에서 높이 솟아 있어 하늘의 신이 강림하는 곳으로 여기고, 그곳에서 신맞이굿과 같은 종교 행사를 하였다. 이러한 산은 세계의 중심되는 세계산, 우주의 중심이 되는 우주산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후세의 민간신앙에서 산악숭배는 당산나무와 당산이 결합한 것에 자취가 남아 있다. 산악숭배의 다른 사례인 진산(鎭山)사상은 신령스러운 산이 한 국가나 지역공동체를 보호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 ‘신라의 삼산오악’, 조선 시대의 산천성황(山川城隍)이 있다.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 그곳에 신시(神市)를 차렸다는 단군신화의 기록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산악신앙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하늘의 신과 동일시된 가락왕국의 시조 김수로(金首露)가 강천(降天)하였다는 구지봉(龜旨峰) 또한 산악신앙의 원류의 하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밖에 신라의 여섯 촌장(村長) 가운데 일부의 시조가 역시 하늘에서부터 산봉우리에 내렸다는 기록도 위의 두 보기와 더불어 생각해야 한다.
이 세 가지 기록에 등장하는 산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시조 내지 시조신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곳이 산 또는 산봉우리이다. 신라 육촌장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나, 태백산과 구지봉의 경우는 그곳이 신맞이굿을 하는 장소 또는 종교행사가 베풀어지는 곳이라는 공통성을 지적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성격을 갖춘 산악의 모습에서 산악신앙의 원초적인 형태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성격의 산악은 또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신화와 일본 신화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우주산’ 또는 ‘세계산’에 견주어 볼 수 있다. 물론, 세계 또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우주산의 중요한 증표의 하나가 태백산과 구지봉의 경우에는 뚜렷하지 않은 흠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구지봉과 태백산의 경우, 다같이 지상에서 높이 솟아올라 있어 하늘의 신이 강림하는 곳, 그리하여 그곳은 신맞이굿을 하는 곳이라는 인상이 있어 두 산을 세계산 내지 우주산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구지봉과 태백산의 이와 같은 성격은 후세의 민간신앙에서 큰 몫을 하는 당산(堂山)에서 그 자취를 느끼게 한다. 더욱이, 태백산과 신단수의 결합은 당산과 당산나무의 결합에 그 자취를 던지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에도 베풀어지고 있는 당산굿은 단군신화 및 수로신화를 오늘날에 재현하는 종교의례로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증산교(甑山敎)에서 교조 강일순(姜一淳)이 하늘에서부터 금산사의 뒷산에 강림하였다고 말하고 있을 때, 그곳에도 역시 구지봉과 태백산의 자취를 느끼게 한다.
세계산의 산악신앙 외에도 ‘진산사상(鎭山思想)’을 들 수 있다. 한 국가나 지역공동체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 신령스러운 산들이 곧 진산이다. ‘신라의 삼산오악’이나 상고대 북방 계열의 예민족들이 믿음을 바쳤다는 산이 진산사상의 가장 오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탈해가 스스로 산신으로 화하여 거기 머무르기를 원하였다는 토함산은 신라의 진산 모습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혹은 하늘이 동명왕을 위해 직접 그 위에 산성을 건설하였다는 ‘골령(鶻嶺)’도 역시 이 계열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진산인 삼산오악은 왕이 친히 나아가서 산제(山祭)를 모시기조차 하였다. 신라는 특히 삼산오악 말고도 명산을 골라 산이 가지는 신앙적인 비중에 따라 대사(大祀) · 중사(中祀) · 소사(小祀)를 올려 산에 제사를 지냈다. 나력(奈歷) · 골화(骨火) · 혈례(穴禮)의 삼산에는 대사를, 토함산 · 지리산 · 계룡산 · 태백산 · 부악 등의 오악에는 중사를, 그리고 상악(霜岳) · 설악 · 화악 · 감악 · 부아산 등 24곳의 산에는 소사를 드렸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는 “삼월삼짇날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여 잡은 사슴을 바치면서 하늘과 산천에 제사 지냈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화랑들이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심신을 단련시켰다거나, 김유신(金庾信)이 입산수도하면서 국가의 위난을 이기려 하였다든가 하는 기록에도 국가를 수호하는 신령이 깃들인 산이라는 관념이 있다.
산제가 국사(國祀), 곧 나라제사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왕이 필요를 느낄 때마다 수시로 산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가령, “부여의 왕은 늙어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이에 산천에 제사지냄으로써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였다.”(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라고 한 기록이나, “왕에게 자식이 없었다. 산천에 기도드리니 이 달 보름날 밤에 왕은 하늘이 말을 전하는 꿈을 꾸었다. 하늘은 그대의 젊은 왕후로 하여금 아들을 가지게 하리라고 이르는 것이다.”(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산상왕조)라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한편, 신라에는 ‘신선이 사는 산’과 ‘불타가 현신하는 산’이라는 관념이 있었다. 이것은 물론 도교와 불교가 들어오고 난 뒤의 일이다. “산중에 예로부터 전하여지는 이야기를 두고 생각컨대, 이 산을 진성(眞聖)이 머물러 있는 곳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장법사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삼국유사 권3, 臺山 오만 진신조), “중이 가로되 이곳의 남쪽 이웃에는 선산(仙山)이 있어 예로부터 어질고 착한 이들이 많이들 머물러 살고, 또 그들의 숨은 힘이 나타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조)라는 기록이 있다.
한편 고려에 이르면, “그때에 신라의 감간팔원(監干八元)이 풍수(風水)에 능하였다. 부소산의 산모양을 보면서 강충에게 말하되, 만일 고을의 남쪽에 소나무를 심어 바위들이 드러나게 하지 않는다면 곧 삼한을 통합하는 이가 나올 것이라 하였다.”(고려사 권1, 고려세계)와 같은 기록이 보여주고 있듯이, 풍수지리설과 관련된 산악사상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여파는 현대에까지 미치게 된다.
고려가 왕의 사신을 보내어 산에 제사 지내고 영험이 현저한 산에는 산에 가호(加號:산에 벼슬을 주어 그 지체를 정하는 일)하던 사례를 조선왕조도 그대로 이어받아 실천하게 되었다. 아울러 조선시대에는 서낭신신앙과 산악신앙이 맺어져서 산천성황(山川城隍)이라는 관념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민간신앙에서의 서낭신숭배와 겹쳐지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산악숭배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