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도는 금강산과 그 주변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이다. 고려 말에는 불교 성지로, 조선 초기에는 중국 사신이나 황실의 선물로 그려졌다. 조선 중기에는 문인들의 활약으로 금강산이 중요한 그림의 핵심 소재가 되었다. 또 조선 후기에는 진경산수화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정선이나 심사정, 강세황 같은 대가들이 금강산을 즐겨 그리며 독특한 화법을 개발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금강산은 새로운 시대정신과 예술적 이상을 담는 대상으로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금강산도는 한국적인 화풍을 발전시키며 유구한 역사와 예술적 창조성을 대변하고 있다.
현존하는 문헌자료와 작품들을 살펴보면 ‘금강산도’라고 불리는 그림은 금강산 지역과 그 주변의 해금강 지역, 관동8경의 명승들, 그리고 때로는 설악산 지역까지 포함해 표현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금강산도는 고려시대 말부터 현대까지 꾸준히 제작되면서 우리나라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 전통의 성격과 특징, 화풍을 대변하는 분야로 자리 잡았다.
금강산이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문학과 회화, 공예 작품의 소재가 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기이하고 아름다운 지질(地質)과 다종다양한 형세를 지닌 산이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의 명성과 그에 대한 신앙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져 국제적인 명승지 또는 순례지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 결과 금강산이라는 명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때로는 민족적인 자긍심으로 격상되기도 했고, 한국적인 예술표현의 터전이 되기도 하였다.
금강산은 개골(皆骨) · 풍악(楓嶽) · 봉래(蓬萊) · 금강(金剛) · 기달(枳怛) · 중향성(衆香城) · 상악(霜嶽) 등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이름들은 각 시대와 사람의 사상과 종교, 이상을 담고 있다. 각기 유래와 의미가 다르며 사용된 시기도 다르다. 이러한 여러 이름들의 형성과 변천 과정은 금강산도의 구성 및 양식의 특징과 변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 고려 말∼ 조선 중기 : 현존하는 작품과 기록으로 보면, 금강산은 고려 말에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고려 말은 금강산은 불교 성지로 각광 받았다. 따라서 이 때의 금강산도는 주로 종교적인 동기에서 그려졌다. 이후 조선 초까지 금강산도는 중국에서 온 사신이나 중국 황실에 대한 선물로 제작되었다. 즉 당시의 금강산도는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금강산에 대한 불교적인 신앙과 명산에 대한 호기심을 배경으로 특수한 수요에 부응하는 그림이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금강산도는 비로소 중요한 화목(畵目)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계층이 문인들이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 금강산도의 성격과 내용, 화풍은 문인적인 사상과 문화, 예술적 관습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현재 우리는 금강산을 그린 그림을 ‘금강산도’라고 통칭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의 금강산도는 대개 해악도(海嶽圖) · 해산도(海山圖) · 풍악도(楓嶽圖) · 동유첩(東遊帖) 등으로 불렸다. 이러한 명칭은 문인적인 아취(雅趣)와 풍류를 연상시키며, 성리학을 추구한 조선시대 문인들의 이념과 취향에 맞는 것이었다. 또한 금강산도의 형식과 내용도 문인들의 기행 관습과 문학적 표현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금강산도란 결국 여행의 공간적, 시간적 이동을 재현하여 쓴 기행문의 구성과 내용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많은 금강산도가 시 · 서 · 화를 겸비한 서화첩(書畵帖)으로 꾸며졌는데, 이것은 문인들이 예술적 이상으로 여긴 시 · 서 · 화 삼절(三絶)의 추구가 금강산도를 통해 발현된 결과였다.
(2) 조선 후기 : 금강산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중심 제재가 되었고, 여러 대가들이 즐겨 다루는 대상이 되었다. 금강산도 화풍의 형성과 전개는 사실상 진경산수화의 변천 과정과 일치한다. 여러 화가들은 금강산을 그리면서 우리나라 산천의 지형지세를 표현하는 독특한 화법(畵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화법을 다른 지역의 실경(實景)을 그린 그림에도 적용하였다.
조선 후기의 금강산도는 다시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8세기 전반기로 정선(鄭敾)과 그 주변 문인들의 활약을 통해 금강산도 또는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이 정립되었다. 이때에는 현실적인 소재를 중시하되 대상의 내면적인 천취(天趣)와 작가의 표현성을 중시하는 천기론적(天機論的) 문예관을 토대로 진경산수화풍이 형성되었다.
정선은 조선 후기에 새롭게 유행하는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매우 한국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그의 금강산도는 강력한 조형(造形)과 빽빽한 구도, 분방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화풍은 이후 금강산도 또는 진경산수화 분야에서 하나의 전형이 되어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두 번째 시기는 18세기 중엽 이후 심사정(沈師正), 강세황(姜世晃), 김윤겸(金允謙), 정수영(鄭遂榮) 등 여러 문인화가들이 진경산수화를 그리는 데 동참하였다. 이들 문인화가들은 기행사경(紀行寫景)을 즐겼고, 금강산도를 그릴 때에는 남종화풍을 토대로 형성된 사의적(寫意的)인 화풍을 추구하였다.
이들의 화풍은 남종화의 화의(畵意)와 기법을 추구하였고 운치와 아취의 표현을 중시하였다. 또 강한 필묵법과 도식적인 표현을 자제하였다. 그 대신 필획(筆劃)의 표현력에 대한 높은 관심과 설채(設彩)의 적극적인 활용, 남종화풍에서 유래된 다양한 준법(皴法)과 수지법(樹枝法) 등 개성적인 표현 기법을 중시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18세기 말∼19세기 전반으로 사실적(寫實的) 화풍의 금강산도가 정립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것은 강세황과 김홍도(金弘道)의 새로운 화풍이었다. 김홍도는 남종화풍을 토대로 하면서도 서양화의 개념과 기법을 적용한 사실적인 금강산도를 그렸다. 그는 작품을 통해 공간감과 입체감, 질량감, 명암과 대기의 표현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것은 결국 18세기 전반 이후 실학자들에 의하여 꾸준히 제기된 객관적인 자연관과 새로운 진경(眞景)의 개념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김홍도가 구사한 진경산수화풍은 정조 연간의 진취적인 정책과 개방적인 분위기, 북학(北學)에의 열기를 배경으로 형성된 사상과 문화를 요약한 ‘시대양식’이었다. 김홍도 이후 19세기 전반의 금강산도는 김홍도의 화풍을 본으로 삼아 그 구성과 기법을 모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사경(寫景)의 기본 원칙인 사생성은 포기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개성적인 표현이 드러났다.
(3) 조선 말기 이후 : 19세기 후반기의 진경산수화는 이전과 비교하면 퇴조하였다. 그러나 금강산도에 관한 한 완전한 쇠퇴는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통해 기행과 문학, 회화적 표현의 전통이 관습화되어 있었고, 특히 금강산에 대한 호기심은 대중적인 수요를 창출시켰다. 그리하여 상층 문인들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금강산도가 면면히 이어지는 한편, 서민 계층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많은 민화(民畵) 금강산도가 제작되었다. 또한 김하종(金夏鍾), 조정규(趙廷奎), 김영(金瑛) 등 여러 화가들이 전통적인 화풍을 바탕으로 하되 당대의 새로운 취향에 적합한 금강산도를 그려냈다.
1920년 창덕궁(昌德宮) 희정당(熙政堂)의 벽화를 제작할 때, 순종은 관동의 총석정(叢石亭)과 금강산의 만물초(萬物草)를 그릴 것을 명하였다. 당시 김규진(金圭鎭)은 궁중 취향에 맞는 화사한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려내면서 다시 한 번 금강산도의 화풍 변화를 시도하였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안중식(安中植), 조석진(趙錫晉), 변관식(卞寬植), 노수현(盧壽鉉), 이상범(李象範) 등 전통회화를 주도하였던 여러 화가들이 금강산을 그렸다. 이들은 전통적인 경물과 구성을 토대로 새로운 화법을 수용하여 실경산수화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남북 분단 이후에도 금강산은 남한과 북한 작가들에 의해 계속 그려지고 있다. 때로는 분단된 현실을 상징하기 위하여, 때로는 한반도의 승경을 대변하는 소재로 추앙되면서 새로운 시대정신과 예술적 이상을 담는 대상으로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금강산도는 오랜 기간 동안 그려지면서 한국적인 문화전통과 화풍을 발전시키는 데 따라서 금강산도는 단지 하나의 회화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생명력, 예술적 창조성을 대변하는 분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