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은 조선 후기, 청나라의 문물·제도 중 일부를 수용하여 조선의 현실 개혁을 추구하였던 기술론이다.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의 번영이 예상과 달리 한 세기를 넘어가자 조선 지배층은 청나라가 ‘중화 문물’을 훔쳐서 지니고 있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연암일파는 중화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는 논리로 청나라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북학의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대외 무역의 장려 등이었는데, 그 이상의 체계적인 경세론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17세기 전반, 청나라에 의해 군사적으로 정복되고 국왕이 항복하는 치욕을 경험한 데다가, 그렇게 했던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해서 중원을 장악하자 조선의 지배층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무엇보다 종족, 지역, 문화의 측면에서 중화의 위상을 독점하고 있던 명나라가 사라지고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함으로써 중화 질서의 붕괴를 초래하였기에 중화와 이적(夷狄)의 구분에 큰 혼란이 발생하였다.
당시의 시점에서 세 가지의 논리가 가능하였다. 첫째, 이적이 중원을 차지하였으므로 중원까지 '오염'되었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에는 중원에서 중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다른 공간에서 중화를 새로 설정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는다. 둘째, 이적이 중원에 들어가서 중화되었다는 논리이다. 셋째, 화이관(華夷觀)의 폐기 가능성의 논리이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시대적인 상상력을 초월해야 하는 셋째는 물론이고, 둘째 논리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대상인 청나라를 중화로 인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 이후로 중화의 가치를 명나라에 버금가게 구비했다고 자부해 온 조선의 지배층으로서는 중원의 문물 · 제도 · 학술까지 모두 오염되었으며, 이제 조선만이 천하에서 유일하게 남은 중화의 계승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이 같은 중화 계승 의식의 전개와 강화 속에서 조선의 지배층은 오직 조선에서만 중화 문물을 징험(徵驗)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타국의 문물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이적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런데 중원을 차지한 지 한 세기가 지난 18세기 중엽 이후로도 청나라의 번영이 지속되자 조선의 지배층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청나라의 몰락을 기대하기보다는 청나라가 중원에서 한 세기 넘도록 번영하는 현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조선 지배층 일부는 청나라와 청나라 문물을 분리해서 이적이 중화 문물을 훔쳐서 지니고 있다는 논리를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면 청나라가 장구하게 번영하고 있는 현실을 청나라가 이적이라는 사실에서 찾아야 하는 곤혹스러움을 피하면서, 그들이 강탈한 중화 문물 덕분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전통적인 화이관을 견지하면서도 청나라가 백 년 넘게 번영하고 있는 현실을 모순 없이 설명하기 위해 청나라와 청나라 문물을 구분한 것이다.
이 같은 논리에서라면, 중원의 문물 · 제도 · 학술이 청나라의 중원 장악과 더불어서 함께 오염되었다는 기존의 인식에는 변화가 불가피하며, 이 논리를 좀 더 확장할 경우 오염되지 않은 중화 문물 덕에 이적이 중화되었을 가능성까지 고려할 수 있었다.
중화 문물이 오염되지 않고 중원에 보존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나 청나라가 중화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당부가 조심스럽게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이런 배경 속에서였으며, 북학 역시 이런 변화된 상황을 등장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중화의 문물이라면 조선이 그것을 도입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문물 · 제도 일부를 들여오자고 주장한 인물들을 총칭해서 북학파라고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인물군은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을 포함한 연암일파(燕巖一派)이다.
북학이라는 용어도 박제가의 저술 『 북학의(北學議)』와 유득공이 지은 「열하관에서 야정시랑에게 화답하며 주다(熱河館中和贈冶亭侍郞)」의 시구 “북학을 생각하다(思北學)”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들은 당색과 적서(嫡庶)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략 1760년대 후반부터 도성의 백탑(白塔)을 중심으로 서로 이웃하면서 친밀한 동인 집단을 이루었으며, 연행의 경험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1778년(정조 2)에는 박제가와 이덕무가, 1790년(정조 14)에는 박제가와 유득공과 이희경이, 1801년(순조 원년)에는 박제가와 유득공이 연행에 동행하였으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의』, 「입연기(入燕記)」,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 『설수외사(雪岫外史)』 등을 남겼다.
연암일파의 중심 인물인 홍대용과 박지원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같다고 여기는 노론 낙론(洛論)의 학맥에 속하였는데, 홍대용은 18세기 후반 낙론의 종장(宗匠)이 된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었고, 박지원은 18세기 전반 낙론을 대표하는 어유봉(魚有鳳)의 사위인 이보천(李普天)의 사위였다. 이런 점 때문에 하늘의 입장에서 인간과 사물을 균등하게 보는 듯한 「 의산문답(毉山問答)」의 관점이나 박지원의 인물막변(人物莫辨)의 논리가 낙론의 사유 구조에서 기인하였으며, 나아가 여기서 청나라에 대한 재인식 및 북학의 논리가 나올 수 있었다는 설명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의산문답」의 저술 의도는 모호하며, 낙론에서의 사물은 외물을 지칭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이적 · 금수의 본성이 그대로 같다고 인식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홍양호(洪良浩)와 같은 낙론과 무관한 인물들도 북학을 주장하고 있었고, 이익(李瀷)이나 정범조(丁範祖)와 같은 낙론과 무관한 인물들도 청나라를 재인식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북학의 사상적 배경으로서 낙론만을 강조하기는 어려우며, 연행의 경험 및 18세기 중엽 이후 청나라의 장구한 번영을 설명하려던 문제의식을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
홍대용은 연행 이전에 이미 청나라가 백 년 동안 태평을 누렸으니 그 규모와 기상을 볼 만하다고 여겼고, 박지원도 만주인들이 중원에 들어온 지 100년이 되니 한인과 다를 것 없이 맑고 단아해져서 문약(文弱)해졌다고까지 보았다. 결국 청나라의 장구한 번영을 설명하기 위해 성대중과 박지원은 18세기 후반 조선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청나라 문물과 청나라를 구분하면서 청나라의 중원 장악과 장구한 번영이 그들이 강탈한 문물에 기인한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박제가 역시 같은 입장이었기에 성대중, 박지원, 박제가에게 있어서 이적이 강탈한 문물은 필요할 경우 이적을 매개로 해서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것은 이적의 문물이 아니라 예부터의 중화 문물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박지원, 박제가는 북벌의 형식적인 구호조차 견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그것은 냉철하고 정확하게 청나라의 정세를 관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북학은 청나라의 장구한 번영을 경험한 18세기 후반의 지식인들이 드러낸 지적 대응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홍대용이 「 임하경륜(林下經綸)」에서 주장한 개혁론이나, 박지원이 「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에서 주장한 한전제(限田制)는 근기남인(近畿南人)의 경세론(經世論)에 비하면 꼼꼼하지 못하고 간략하며, 독창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북학이 연암일파가 지닌 학풍의 성격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의 『 열하일기(熱河日記)』와 박제가의 『 북학의(北學議)』는 북학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저술이다.
북학의 주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 등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는데 서양의 기술은 배우고 기독교만 막자는 박제가의 주장에서 드러나듯 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미비하였으며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였다.
예를 들어서 박지원과 박제가는 수레 사용을 확대함으로써 지역 간의 가격 차이를 해소하여 민간을 이롭게 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시키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수레를 이용한 평안도 화물 운송 체계의 개선 시도나 18세기 화물용 수레의 토목공사 투입 등에도 불구하고 수레의 사용이 부진하였던 것은 산지가 많은 지리적 조건 및 해 · 수로 중심의 운송 체계가 발달해 있던 조건과 관련된 결과였다. 즉, 수레를 통한 운송은 도로망의 구축과 유지 · 보수는 물론 수레를 끌 가축의 확보가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가축이 확보되어도 먼 거리가 아니면 물품을 그냥 가축에 싣고 가는 게 효율적이었고, 먼 거리라면 선박을 이용하는 것이 나았다. 수레 사용의 확대를 강하게 주장하려면 이런 점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가 우선되었어야 하지, 유득공의 말처럼 한번 호령하면 될 일도 아니었고, 박지원과 박제가의 주장처럼 수레가 도입되면 도로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박지원과 박제가는 조선의 짧은 자루 호미를 이용한 농사일의 비효율성을 비난하면서, 중국식 긴 자루 호미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극찬하였다. 그에 비해서 『 천일록(千一錄)』의 저자인 우하영(禹夏永)은 조선식 호미를 활용한 잡초 제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호미질을 많이 함으로써 흙덩이가 부드럽게 되고 곡식의 뿌리가 잘 퍼져나간다고 설명하였다.
본디 긴 자루 호미는 지표면 위의 풀을 제거하면서 흙을 움직여 토양 내 수분 증발의 통로가 되는 모세관을 차단하는 한편, 지표면 아래의 흙은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땅속의 수분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것으로는 땅을 뒤집어엎음으로써 잡초를 뿌리까지 제거하거나 흙덩이를 연화시키는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까지 한반도에서 단연 짧은 자루 호미 사용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조선의 실정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어 사용을 주장할 정도로 모화적(慕華的) 성격이 강했던 박제가에 대해서 이덕무가 우리와 다른 중원의 풍속을 사모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경계하였던 것이나, 서유구가 중국의 농업 기술을 도입할 때도 그 기준은 오직 조선의 현실에 적용 가능한지의 여부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음을 감안하면, 연암일파가 동일한 지향점을 지닌 학술 공동체였는지에 대한 판단은 신중하게 내려야 한다.
19세기 이후로도 북학의 유산 일부가 다음 세대에 전해졌지만 이론적 체계를 지닌 경세론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이런 한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화 계승 의식, 대명 의리론, 북벌론이 일체화되었던 사상적 경향에 균열이 생기고, 18세기 이후 북벌론이 중화 계승 의식과 대명 의리론으로부터 분리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되며, 19세기 말의 개화파와도 인적 계보로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