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 출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대유(大猷), 호는 취석실(醉石室). 아버지는 우정서(禹鼎瑞)이며, 큰아버지 우정태(禹鼎台)에게 입양되었다.
1755년(영조 31)부터 과거공부를 시작하여 여러 번 응시했으나 회시(會試)에서만 12번 낙방하는 등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당시 만연했던 과거 부정이나 관직 구걸 운동을 마다하고 시골의 유생으로 평생을 보낸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농촌 지식인이었다.
우하영은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고 사회실정을 체험하였으며, 옛 문헌과 당대 제가들의 논설을 널리 읽고 수집하여 국가·사회의 경영 및 개혁 방안을 종합한 『천일록(千一錄)』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전제(田制)·군제·국방·관제·농업기술 문제 등에 관한 그의 독창적인 사상과 정책을 기술한 것이다.
1796년(정조 20) 조정의 구언교서(求言敎書)가 내리자 우하영은 이를 정리하여 책자로 만들어 바쳤다. 1804년(순조 4)의 구언 때 이를 다시 보완하여 『천일록』이라는 제명으로 조정에 상정했으나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전자는 ‘수원유생우하영경륜(水原儒生禹夏永經綸)’이라는 제명으로, 후자는 ‘천일록’이라는 표제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우하영의 사회·경제사상의 핵심은 권농 정책에 있었다. 우하영은 권농관(勸農官)의 설치, 권농 절목 마련, 농서 반포, 수차(水車) 보급, 양전과 조세의 공평, 농지 확장 등을 주장했고, 무위도식자나 부유자(浮遊者)를 엄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한편 우하영은 상업적 농업과 시장 경제에 의한 정당한 이윤 추구를 인정했고, 공명첩(空名帖)에 의한 부농의 신분 상승을 긍정하였다. 그러나 농민층의 분화에 의한 전통적 공동체의 해체를 우려했고, 상민들의 양반 멸시를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의 광작(廣作) 농업 경영을 비판하고, 화성장시(華城場市)에서 외부 행상의 금절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우하영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실학적 근대성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전통적 양반 사회의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한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우하영의 광범위하고 창의적인 개척 정책은 당시 농촌 지식인들의 의식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국가 정책에는 반영되지 못했고, 별다른 주목도 받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