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의 권농사(勸農使)는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의창(義倉)의 쌀과 소금을 내어 백성을 구제하거나, 곡식을 분급해 농경을 권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1173년(명종 3)에는 안찰사(按察使)와 감창사(監倉使)가 권농사를 겸하였다. 그 뒤 따로 두었다가 1287년(충렬왕 13)에는 안렴사(按廉使)로 겸하게 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권농관으로 바꾸었다.
즉, 1395년(태조 4) 정분(鄭芬)의 건의로 각 주(州)·부(府)·군(郡)·현(縣)의 한량 품관(閑良品官) 중 청렴하고 재간 있는 자를 권농관으로 삼아 저수지를 수축해 가뭄과 장마에 대비하게 하였다.
권농관의 근무 성적은 각 도 관찰사가 고과해 포폄(褒貶)하였다. 농민에게 농경을 권장하고 수리와 관개 업무를 관장했던 권농관 외에, 수령(守令)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 면(面)에도 설치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서울과 지방은 5호(戶)를 1통(統), 5통을 1리(里)로 하고, 몇 개의 이를 합쳐 1면(面)을 만들고, 통에는 통주(統主), 이에는 이정(里正), 면에는 권농관을 각각 둔다.”고 하였다. 그러나 법규대로 조선 초기부터 정비된 면리제(面里制)가 실시되지 못하자, 권농관도 전국적으로 설치되지 못하였다.
중기부터 면리제가 정착되면서 면임(面任)으로서 권농관이 점차 보급되어 갔다. 군현의 하부 구획 단위인 면은 각 도에 따라 명칭이 달랐는데, 평안도와 황해도에는 방(坊), 함경도에는 사(社), 기타 도에는 면이라 하였다. 따라서 면임의 명칭도 군현에 따라 권농관·권농감고(勸農監考)·방외감(方外監)·풍헌(風憲) 등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