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馬政)이 고대부터 교통·군사·축산·외교상의 필요로 크게 중시되자 전국 각지에 목장이 설치되고, 거기에 따른 갖가지 시설과 제도 및 관원이 생겼다.
고려시대에는 내륙과 섬에 설치되었던 목장에 목감(牧監 : 牧監直)과 노자(奴子 : 후에는 牧子)를 배치해 직접 마필의 사육에 종사하게 하였다. 또 간수군(看守軍)인 장교와 군인을 배치해 목장을 간수하도록 하였다.
조선 초기 대명외교(對明外交)에서 마필의 수요가 급격히 증대되자 목장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시책이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목장이 있는 각 고을 수령에게 그 곳 목장 관리 업무를 겸임하게 했다가, 1426년(세종 8)에 각 도의 목장 소재지에 전임의 감목관을 두었다. 그 뒤 목장 부근에 있는 역승(驛丞)과 염장관(鹽場官) 가운데 6품 이상의 관원을 뽑아 겸임케 하였다.
1445년에 다시 각 도의 감목관을 없애고 부근의 수령과 만호(萬戶)를 겸임하게 하였다. 당시 최대의 목장이 있던 제주도에는 제주판관과 정의(旌義)·대정(大靜) 현감이 겸임했고, 경기도와 전라도는 목장의 과다로 별도의 감목관 1인을 두었으나 폐단이 많아 곧 폐지되었다. 1575년(선조 8)에는 전임의 감목관을 모두 없애고, 그 대신 소재지의 수령이 겸임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각 목장의 감목관이 때로는 전임관, 때로는 수령이 겸임해 목장의 관리, 마필 사양과 번식 및 목자의 보호에 힘썼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30개월을 만기로 하는 감목관(종6품)의 정원은 경기도에 5인(江華·水原·南陽·仁川·長峰島), 충청도에 1인(瑞山), 경상도에 3인(晉州·蔚山·東萊), 전라도에 5인(興陽·順天·羅州·珍島·濟州), 황해도에 3인(海州·豐川·長淵), 함경도에 3인(咸興·端川·穩城), 평안도에 1인(鐵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인천은 영종첨사(永宗僉使), 장봉도는 만호, 서산은 평신첨사(平薪僉使), 동래는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 해주는 등산첨사(登山僉使), 풍천은 초도첨사(椒島僉使), 장연은 백령첨사(白翎僉使), 철산은 선사포첨사(宣沙浦僉使)가 각각 겸임하고, 나머지 목장은 소재읍의 수령이 겸임하였다.
고종 때에 와서는 중인과 서족(庶族)으로서 수령에 천거되려면 먼저 감목관을 지내야 하였다. 따라서 전임 감목관은 주로 무과 출신자와 중인층에서 임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