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 이후 벼농사 기술은 이앙법(移秧法) 기술이 지역적으로 점차 보급되면서 확산되었고, 밭농사 기술도 1년에 2회 농사짓는 2모작이 안정적으로 수행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토지의 소유와 경영에 변화가 나타났다. 토지 소유의 집중화 현상뿐만 아니라 토지 경영의 집중, 확대가 나타났는데, 후자를 특히 광작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점진적인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농민 1인당 경작 가능 면적이 확대되었는데, 특히 이앙법의 보급에 따라 제초에 들어가는 노동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직파법(直播法)의 경우 김매기를 적어도 45차례에 걸쳐 수행해야 하지만, 이앙법을 채택할 경우 23회로 줄일 수 있었다.
이러한 노동력의 절감 덕분에 농민들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 규모가 확대될 수 있었다. 일정 면적의 벼농사에 투입하는 데에서 절감된 노동력은 밭에서 재배하는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데에도 투여되었다. 특히 17세기 초반 이후 담배가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는데, 담배 경작에는 많은 노동력의 투입이 필요하였다.
벼농사에서 절감된 노동력은 김매기 노동이 많이 필요한 면화 재배에도 투입되었고, 고추 · 호박 등의 새로운 밭작물 재배에도 투입되었다.
광작에 참여한 농민 계층은 토지 소유 규모를 확대해 나간 전주(田主)나 자작농(自作農)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전답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小作農) 가운데 일부도 광작에 나섰다.
대토지 소유자는 소작농에게 임대하던 토지를 회수하여 자기가 소유한 노비(奴婢)를 동원하거나 또는 일시적인 농업 임금 노동자에 해당하는 고공(雇工)을 고용하여 광작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궁방(宮房)과 아문(衙門)의 지주제 경영과 관련하여 궁방전(宮房田)과 아문둔전(衙門屯田)의 농업 경영에 참여한 소작농도 광작에 나섰다. 궁방이나 아문이 개간이나 간척을 통해 토지 규모를 확대할 때 일정하게 기여한 소작농은 소작 규모를 늘려서 광작에 참여하였다.
광작에 가장 앞장선 계층은 자작농 가운데 부농층이었다. 이들은 넓은 토지를 경작하면서 농토가 전혀 없고, 소작지도 얻지 못한 농민들을 임노동(賃勞動)으로 고용하면서, 계절적 · 지역적 미가(米價) 차이를 염두에 둔 시장 판매를 목표로 농업 경영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소작농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상대적으로 소작지 확보를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소작농 사이에서 소작 경영 규모를 확대하여 광작에 나서는 경우와 아예 소작지 확보에 실패하여 유민(流民), 고공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작지라도 균등하게 배분하자는 균병작론(均竝作論)이 제기되었다.
광작은 지역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 천일록(千一錄)』을 지은 우하영(禹夏永)에 따르면, 땅이 좁고 사람이 많은 도성(都城) 부근이나 호서(湖西) 지역에서는 그다지 성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지역에서 많이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광작이 성행한 곳에서는 소작농이 차경(借耕)할 농지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8세기말 정조에게 『응지농서(應旨農書)』를 올린 이광한(李光漢)은 지주가 소작인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균병작(均並作)을 주장하면서, 소수자의 광작이 다수 빈농들에게 소작지 차경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하므로 광작을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북방 지역의 경우 땅은 넓고 사람이 드물어서 애초부터 농민들이 토지를 광점(廣占)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도 북방은 여전히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광작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농사 기술에 능숙한 농부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큰 수확량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광작의 영향으로 농민 1인당 경작 능력이 크게 늘어나면서 이농(離農)이 증가하고 임노동이 발생하였다고 보는 입장이 강조되었다. 또한, 광작이 지역과 계층 및 개별 농민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 실행에 옮겨질 수 있다는 점과 광작으로 거둘 수 있는 생산성 향상이 제한적이라는 입장이 제시되었다.
대체로 농민 1인당 경작 능력이 농기구의 발달 수준, 토지 경영 규모의 요인에 따라 증가하거나 축소한다는 점이 주목을 받고 있다. 즉, 일방적으로 경작 능력의 향상에 의거하여 이농이 촉발되고, 임노동의 발생을 유발하고 나아가 토지 소유 관계의 변동 내지 농촌 분화의 촉진을 가속화하였다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광작이 농업 생산력의 발달을 바탕으로 노동 생산성을 높여 시장 생산을 지향하는 경영 방식이었지만 지주와 부농의 광작은 소작인의 차지(借地)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대립도 격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