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방전은 일명 궁장토(宮庄土) · 사궁장토(司宮庄土)라고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후비, 왕자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 현주 등의 궁방에서 소유권이나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토지이다. 궁방의 소요 경비와 그들이 죽은 뒤 제사를 받드는 비용을 위해 지급되었다.
원래 궁실의 경비로 고려 때에는 궁원전(宮院田)이나 공해전(公廨田)이 지급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이것이 왕족에게 사전(賜田), 직전(職田)의 형식으로 지급되었다. 직전으로 대군은 225결, 군은 180결이 분급되었는데, 명종 때 직전제가 소멸되면서 자연히 궁방전의 지급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되었다.
궁방전의 설치는 각 궁방에 따라 다르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후 왕족에게 궁방전이 지급되었는데, 이른바 일사칠궁(一司七宮)이 대표적이며, 여기에는 내수사(內需司), 수진궁(壽進宮),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 육상궁(毓祥宮), 용동궁(龍洞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등이 포함된다. 그 밖에 수시로 왕자 · 왕녀의 궁방전이 설정되었다. 내수사는 조선 건국 이래의 내수소가 1446년(세조 12)에 개칭된 것으로서, 조선 초기 내수사전의 경작에는 이미 면역의 특권이 주어졌다. 이 때문에 민전(民田)의 투탁(投託)이 날로 많아져 농장이 확대되었다.
성종 초에 내수사전의 농장이 전국에 325개소나 되어, 그 폐단을 없애고자 239개소로 축소하는 조처를 내렸다. 내수사전은 고려시대의 장(莊) · 처(處)와 같은 왕실 재정으로서 이미 막대한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궁방전은 임진왜란 중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선조가 23인의 왕자와 옹주에게 어전(漁箭) · 염분(鹽盆) · 시지(柴地) 등을 임시로 변통해 나누어 주었고, 뒤에 이 선례에 따라 토지를 공식적으로 지급하게 된 것이다.
궁방전은 유랑하는 농민을 안주시키고, 궁가의 경비를 자급하려는 취지로 궁방에 진황전(陳荒田)을 주어 개간하게 하였다. 따라서, 면적의 제한이 없었으며 수세액도 규정된 정액이 없었다. 인조 때부터 궁방의 전토와 어전 · 염분이 국고 수입을 감소시키고 민폐가 크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이에 1663년(현종 4)에는 궁방전의 면적을 축소해 대군 · 공주는 400결, 군과 옹주는 250결로 감하였다. 그러나 궁방전은 갈수록 늘어났다. 또한 궁방전 중에는 종래에 분급된 토지, 궁방에서 매입한 토지, 부세를 이부(移付)한 토지 등이 섞여 있어서 운영상에도 혼란을 가져왔다.
궁방전을 늘리는 방법으로는 황무지의 개간, 궁방의 권세로써 남의 토지를 빼앗는 것, 범죄자로부터 몰수한 토지의 분급 등이 이용되었다. 이 밖에 농민들이 피역이나 기타의 편의를 위해 투탁한 토지, 소속 노비의 자손 단절로 그들의 토지를 인수하는 등의 수법을 썼다. 그리고 전국 여러 곳에 걸쳐서 토지를 겸병하였다. 따라서 이들에 의한 토지 확장은 아래로는 농민을 협박하고 위로는 국가 재정의 부족을 초래해 사회적 · 정치적으로 큰 폐단을 자아내었다.
그리하여 1729년(영조 5)에는 출세전(出稅田)과 면세전으로 정리되었고, 『속대전』에는 유토면세(有土免稅)와 무토면세로 정리되었다. 유토면세는 영작궁둔(永作宮屯)이라 하여 궁방이 토지의 소유권과 수조권을 가진 토지를 말한다. 무토면세는 원결궁둔(元結宮屯)이라 하여 궁방이 그 토지의 수조권만을 가진 토지를 말한다.
그 뒤 1750년 균역법이 실시되면서 궁방이 소유하던 어전과 염분이 혁파되어 국가의 수세 재원이 되었다. 그러나 궁방전은 면세의 특권과 그 전호들에게 여러 가지 요역을 경감해 주는 혜택이 주어져 궁방에 민전이 투탁되었고, 이를 통해 무토면세전은 확대되어 갔다. 출세결까지 포함한 전체 궁방전의 규모는 18세기 후반에 대해서만 확인되며, 대략 3만 5천여 결 수준이었다.
면세결에 관해서는 시기별 변동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히 조사된 바 있으며, 1778년에는 32,812결, 1787년에는 34,400결, 1807년에는 38,327결, 1814년에는 38,302결, 1824년에는 33,636결, 1854년에는 40,516결, 1860년에는 38,953결, 1874년에는 27,309결, 1880년에는 28,151결, 1884년에는 26,773결, 1895년에는 28,599결이었다. 시기별로 약간의 변화가 있고, 1860년대까지와 그 이후로의 단절적 변동이 확인된다.
궁방전의 운영은 왕실의 권력을 배경으로 강력한 지주권을 행사해, 궁방전 전호에 대한 처벌권, 차압권,인신구속 등이 강제적으로 행해졌다. 궁방의 관리는 궁방 직속 관원인 궁차를 파견해 관리하거나 궁방전의 관리 청부인인 도장(導掌)을 파견해 관리하였다. 궁방 직속으로 감관(監官), 마름(舍音) 등을 두었다.
1894년(고종 31)에 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된 갑오승총으로 면세의 특권과 무토면세의 수조권이 폐지되었다. 유토면세지도 왕실 소유로 하여 궁내부에 이관시켰으며, 투탁 · 점탈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리고, 나머지는 모두 국유지로 편입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