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의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었던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의 잠저와 제17대 왕인 효종의 잠저를 일컫는 궁궐의 이름이다. 인조의 잠저는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에 있었으며, 효종의 잠저는 숭교방 어의동에 자리했었다. 각각 당대에는 본궁이라 하였지만, 조선 말기에는 인조의 잠저를 상어의궁, 효종의 잠저를 하어의궁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어의궁(於義宮)은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仁祖, 1595~1649)가 1623년(광해군 15) 반정(反正)을 일으켜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곳이다.
인조는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의 제택(第宅)인 송현궁(松峴宮: 훗날의 저경궁)에서 태어나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인열왕후(仁烈王后)가 되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와 혼인한 것은 1610년(광해군 2)으로, 이때부터 상어의궁(上於義宮)으로 나와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인조는 1623년에 서인인 김유(金瑬) · 이귀(李貴) · 이괄(李适) · 최명길(崔鳴吉) 등이 일으킨 정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이후 상어의궁은 인조의 어휘(御諱)를 봉안하는 곳으로 남게 되었다. 1756년(영조 32)에 영조가 거둥(擧動)하여 봉안각에 절을 하여 예를 표하고 ‘인묘고궁(仁廟古宮)’이라 써서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하어의궁(下於義宮)은 효종(孝宗, 1619~1659)이 왕자 시절 살던 궁가(宮家)로 용흥궁(龍興宮)이라고 하였다. 용흥궁이라는 이름은 1759년(영조 35)에 영조가 어의궁에 들러 「용흥구궁소지(龍興舊宮小識)」를 지었다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효종은 인조의 잠저(潛邸)였던 상어의궁, 즉 향교동(鄕校洞) 어의궁에서 태어났다. 인조 즉위 후 8세가 되던 1626년(인조 4)에 봉림대군에 봉해졌고 1631년(인조 9) 인선왕후(仁宣王后)와 가례(嘉禮)를 행하고 궐 밖으로 나와 살기 시작하였다. 하어의궁은 이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 돌아온 봉림대군이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즉위하면서 하어의궁은 본궁이 되었다. 이후 하어의궁은 국왕의 호적을 보관하며 가례를 올리는 별궁으로 기능하였다. 본궁의 기능은 1907년(융희 1) 폐지되고 제실 재산 정리국 관제(帝室財産整理局官制)에 의하여 모든 재산이 제실관리국으로 넘어갔다
효종의 잠저였던 하어의궁의 모습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보관 중인 「인평대군방전도(麟坪大君坊全圖)」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단부에 그려져 있는 궁가가 1751년(영조 27) 10월 8일 영조가 어의궁에 방문하여 올랐던 조양루(朝陽樓)가 있는 하어의궁이다.
어의궁은 인조와 효종의 본궁(本宮)의 이름이다. 인조의 잠저는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에 있었으며, 효종의 잠저는 숭교방 어의동(於義洞)에 자리했었다. 각각 당대에는 인조의 잠저를 향교동 본궁, 효종의 잠저를 어의동 본궁이라 하였지만, 조선 말기에는 인조의 잠저를 상어의궁, 효종의 잠저를 하어의궁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향교동 어의궁은 후대에 인조의 어휘를 봉안하는 곳으로 기능하였다. 어의동 어의궁은 효종 즉위 후 즉위하기 전 효종의 호적을 보관하며 왕실의 별궁 기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