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궁 ()

조선시대사
유적
조선시대 한성 중부 수진방에 자리하면서, 후사가 없이 죽은 왕의 자녀 및 후궁 등의 제사를 관리하던 궁가.
이칭
이칭
수진본궁(壽進本宮) , 신본궁(新本宮)
유적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중종
소재지
한성부 중부 수진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51번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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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수진궁은 조선시대 한성 중부 수진방에 자리하면서, 후사가 없이 죽은 왕의 자녀 및 후궁 등의 제사를 관리하던 궁가이다.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궁가였다가 중종의 본궁이 되면서 수진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복구된 뒤 효종의 비(妃)이자 숙종의 모후(母后)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후사 없는 왕의 자녀 및 후궁의 사판에 대한 시향과 묘제를 전담하기 시작했다. 1909년(융희 3)에 폐지되었다.

정의
조선시대 한성 중부 수진방에 자리하면서, 후사가 없이 죽은 왕의 자녀 및 후궁 등의 제사를 관리하던 궁가.
건립경위

수진궁(壽進宮)은 조선시대 후사가 없이 죽은 왕의 자녀 및 후궁 등의 제사를 관리하던 제사궁(祭祀宮)이다. 자리한 곳의 조선시대 행정구역은 한성부 중부 수진방으로,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궁가였다가 중종의 본궁이 되면서 수진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변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복구된 뒤 효종의 비(妃)이자 숙종의 모후(母后)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후사 없는 대군 · 왕자 · 공주 · 옹주 · 후궁 등의 사판(祠版)에 대한 시향(時享)과 묘제(墓祭)를 전담하게 되었다.

수진궁은 내수사(內需司), 용동궁(龍洞宮), 어의궁(於義宮), 명례궁(明禮宮)과 더불어 중요하게 관리되던 궁가였다.

1907년(융희 1)에 궁내부령(宮內府令)에 의하여 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도장을 없애고 제실 재산 정리국 관제(帝室財産整理局官制)에 의하여 모든 재산이 제실 관리국으로 넘어가면서 1909년(융희 3)에 폐지되었다.

의의 및 평가

수진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51번지 일대에 자리했던 궁가로 건물의 배치는 규장각 도서인 『가사(家舍)에 관한 조복문서(照覆文書)』 중 「수진궁급용동궁건물부속토지조사보고(壽進宮及龍洞宮建物附屬土地調査報告)」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수집궁급용동궁건물부속토지조사보고(壽進宮及龍洞宮建物附屬土地調査報告)」(『가사(家舍)에 관한 조복문서(照覆文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한경지략(漢京識略)』

단행본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Ⅰ(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7)
『서울특별시사(特別市史)-고적편(古蹟篇)-』(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논문

조영준, 「조선후기 궁방의 실체」(『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3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8)
정정남, 「조선시대 수진궁의 기능과 주변 박석길의 의미 해석」(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2011.11)
집필자
정정남(㈜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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