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역법 ()

조선시대사
제도
1750년(영조 26), 양역제(良役制)의 개선을 위해 실시하였던 재정 제도.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1750년
공포 시기
1750년
시행 시기
1750년
시행처
균역청
주관 부서
균역청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균역법은 1750년, 양역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시한 재정 제도이다. 양역에게 균등하게 1필을 부과하고 각 관청의 재정 손실분에 대해서는 어염선세, 선무군관포, 은여결세, 결전을 균역청에서 확보하여 각 관청에 지급해 주는 제도이다.

정의
1750년(영조 26), 양역제(良役制)의 개선을 위해 실시하였던 재정 제도.
제정 목적

양역(良役)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인 역역(力役)을 법제적인 구별인 양인과 천인의 두 신분층 가운데서 양인에게 부담시킨 일종의 신역(身役)이다. 처음에는 역역을 직접 징발하였으나 16세기 이후 군역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는 대립제나 군역을 지지 않고 해당 관청에서 무명 또는 곡물로 대신 납부하는 방군수포제로 전환되었다. 결국 조선 후기에는 소속 관청에 군포를 납부하는 방식이 일반화되면서 국가 재정 수입의 큰 몫을 차지하는 부세(賦稅)의 형태가 되었다.

양역은 제도 자체의 모순과 운영상의 결함 등으로 폐단을 야기하고 사회의 동요까지 초래하게 되자 그 대책이 오랫동안 여러 방식으로 논의되었다. 이를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라 부른다. 여러 방안이 제시되었으나 1750년(영조 26) 양역의 부담을 대폭 줄여서 포 1필로 균일화하는 감필론이 채택되고 동시에 그에 따른 재정 결손의 보완책 마련에 착수하였다. 1년여의 논의 끝에 1752년(영조 28) 어염세(魚鹽稅) ·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 은여결세(隱餘結稅) · 결전(結錢) 등의 새로운 세금을 통해 보충하도록 하는 내용의 균역법이 실시되었다.

제정 경위

양역의 폐단에 대한 대책 논의는 양역제를 유지하면서 폐단을 해결하려는 소변통론과 양역제 자체를 폐지하려는 대변통론으로 나누어진다. 효종과 현종 연간 이래 계속되어서 숙종 때에는 군사비 지출을 줄이기 위한 군사 수의 감축, 군문(軍門)의 축소와 같은 소변통론(小變通論)과 양역제의 철폐를 전제로 한 호포(戶布) · 구전(口錢: 인구의 수에 따라 양역에 해당되는 세금을 거두는 방법. 일종의 인두세) · 결포(結布) · 유포(遊布) 등의 대변통론이 여러 사람에 의해 각기 내용을 달리하여 주장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금위영(禁衛營)이 폐지되고, 한시적이기는 하나 관서 지방에 호포가 실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력 약화를 우려하는 국왕과 신분적 특권을 앞세우는 양반층의 이해관계가 얽혀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바로 원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과정에서 양역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어떠한 개혁책도 당시의 실정에서는 선뜻 시행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 결과 양역제는 그대로 유지하되 다만 양역의 부담을 반감(半減)함으로써 양역 폐해에 시달리는 양민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고 그 고통을 완화하자는 감필론(減疋論)이 숙종 말년부터 유력해졌다. 균역법의 내용을 구성하는 한 축인 감1필(減1疋)은 바로 이 감필론에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감필에는 막대한 재정 손실이 예상되므로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했다. 영조 이후의 양역 논의는 주로 감필과 그 재정 보완책의 모색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탕평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노론 · 소론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거듭되던 정국이 1740년(영조 16)의 경신처분(庚申處分)과 뒤이은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노론 명분 속에 소론이 참여하는 형세로 어느 정도 안정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양역 문제의 해결을 통해 탕평의 가시적 성과를 드러내고자 하는 국왕과 탕평파의 정치적 의도가 맞물리면서 그 동안 지지부진하던 양역 논의는 마침내 균역법의 제정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 계기는 1750년(영조 26) 5월 호조판서 박문수가 호전론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박문수의 호전론은 예상을 초과한 호당 징수량(戶當徵數量)의 산출과 호적법의 미비로 결국 무산되었지만 그것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감필과 결부시켜 시행하려는 논의가 일어났다. 감필을 하고 부족분을 호전으로 충당한다는 감필호전론(減疋戶錢論)인데, 이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영조는 같은 해 7월 전격적으로 양역의 부담을 반으로 줄여 1필로 균일하게 하는 내용의 감필을 단행하였다.

균역법의 첫 단계는 감필이 단행된 이상 그에 따른 재정 결손을 보완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을 책임자로 하고, 신만(申晩) · 김상로(金尙魯) · 김상성(金尙星) · 조영국(趙榮國) · 홍계희(洪啓禧)를 실무자〔句管堂上〕로 하는 균역절목청(均役節目廳)이 설치되어 감필에 따라 줄어든 만큼의 비용을 해당 관청에 보충하는 급대책을 강구하였다. 급대에 필요한 재원은 총계 100만 냥 정도로 추산되었으나 당시의 빈약한 재정 상황에서 이를 조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우선 각 군영의 규모 축소와 군사 수의 감축 · 군사 시설의 병합 · 각 관청의 재정 지출 절약 등에 의해 급대해야 하는 수요를 줄인 이후, 나머지는 왕족이나 궁방(宮房)에 주어져서 국가 세원(稅源)에서 제외되었던 어염세를 다시 국고(國庫)로 환수하여 충당하였다. 또한 양반이 아니면서 양역의 부과 대상에서 빠져 있는 피역자 내지 한유자(閑遊者)에게 일정한 비용을 징수하고〔選武軍官布〕, 그동안 관행적으로 지방 수령의 사용(私用)으로 묵인되어 오던 은결(隱結) · 여결(餘結)에서의 수입을 국가로 돌리는 등의 새로운 세원(稅源)을 급대 재원으로 확보하였다. 이렇게 하고도 부족한 액수는 각 고을에 일정량을 할당하여 징수하는 분정(分定)의 방식을 취하기로 하는 방안이 일차적으로 마련되었다.

이 방안이 알려지자 왕실이나 한유자 · 수령 등 이익을 잃게 된 쪽의 반발이 심하게 일어나고 불합리한 분정 방식에 대한 비판이 크게 생겨났다. 마침내 홍계희의 주장에 따라 분정을 폐지하는 대신, 기존의 토지 세금에 1결당 쌀 2두씩을 추가 징수하는 결미(結米) 조항을 신설하였다. 또한 처음에 마련된 어염세 · 선무군관포 · 은여결세 등의 급대 재원에 약간의 수정을 더하여, 감필이 단행된 지 1년여가 지난 1751년(영조 27) 9월에 균역 사무를 담당할 관청으로서 균역청을 옛 수어청 자리에 설치하면서 비로소 균역법은 정식으로 시행되었다.

내용

균역법은 크게 감필 대상을 규정한 '감필 균역(減疋均役)'과 그에 따른 재정 결손을 보완하기 위한 대책인 '급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감필 균역은 단순한 감필에만 그치지 않고 종전에 약간씩 차이가 있던 양역 부담량을 1필로 통일하여 균일하게 한다는 것인데 감필의 시행과 함께 모든 양역 명목의 부담이 1필(돈으로 낼 때는 2냥)로 재조정되었다.

재정 결손 보완책인 급대와 관련해서는 1752년(영조 28) 균역청에서 편찬한 『균역청사목』에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균역청사목』에는 감혁(減革)과 급대 재원(給代財源), 급대처(給代處)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감혁이란 급대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군문과 관청의 체제를 변경하고 영(營) · 진(鎭)을 통폐합하여 군사의 수를 감축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감축된 군사의 수는 2만 919명인데, 이 숫자만큼 급대 비용이 생략되며 동시에 이들을 군포 납부자로 전환시킴으로써 군포 수입이 늘게 되는 셈이다. 감혁에는 그 밖에도 약 10만 명에 이르는 병조 소속의 기보병〔兵曹騎步兵, 보통 이군색(二色軍)이라 하며 선포군(納布軍)〕과 같이 2필에서 1필로 반감하는 것이 아니라 납부 기간을 조정함에 따라 실제로는 1/3만 감해 주는 방식, 즉 양정(良丁) 1인이 16개월에 2필(疋) 내던 것을 12개월에 1필(疋) 내게 하는 방식이 있었다. 또 금위영의 정군자보(正軍資保)나 각 도의 영 · 진 소속 군병의 경우 감필의 재정 손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급대를 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감혁에 의해 줄어든 액수는 홍계희가 지은 『균역사실(均役事實)』에 의하면, 대략 50만 냥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40∼50여만 냥이 남아 있었고, 이것은 급대를 지급해 주어야 하는 최소한의 양이었다.

급대 재원이란 바로 이러한 급대에 소요되는 비용을 확보하는 세원을 말한다. 모두 5종류가 있었다. 『균역청사목』에는 ① 이획(移劃), ②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③ 어염선세(魚鹽船稅), ④ 은여결세(隱餘結稅), ⑤ 결미(結米 또는 결전(結錢))의 5항목이 들어 있다. ① 이획이란 선혜청이 관리하면서 지방에 쌓아 놓은 저치미(儲置米)와 감사(監司)의 가족 동반을 금지한 데서 절감된 영수미(營需米) 등을 균역청으로 옮겨와 급대 비용으로 삼게 한 것(1770년경 이후에는 없어짐). ② 선무군관포는 군역을 피하고 있는 한정(閑丁)을 선무군관으로 삼아 일부를 시취(試取)하는 대신 1인당 1필씩 징수하는 것. ③ 어염선세는 해세(海稅)라고도 하는데, 왕족이나 궁방에 지급되었던 어전세(漁箭稅) · 염분세(鹽盆稅) · 선세 등을 국고로 돌려 균역청 수입으로 삼게 한 것. ④ 은여결세란 그동안 수령이 사사로이 쓰도록 묵인되었던 은결 · 여결에서 거둔 세금을 수령의 자발적 보고에 의해 균역청으로 돌린 것. ⑤ 결미란 평안 · 함경도를 제외한 6도의 토지에 대해 1결 당 쌀 2두 혹은 돈 5전을 거두는 것으로 급재 재원의 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컸다. 이렇게 확보한 급대 재원의 총 액수는 69만 냥을 넘고 있는데, 결미에서 거둔 세금 중 약 8만 냥은 지방에 있던 군병의 급대 재원으로 지방에 남겨두었으므로 균역청의 실제 수입은 이를 뺀 60만 냥 정도였고 이후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이 선은 유지하였다.

한편 급대처는 감필에 의해 재정 손실을 보게 된 군문 · 아문과 지방의 영 · 진에 급대해 주어야 할 액수를 규정해 놓은 것으로 감혁과 미급대(未給代)에 따라 재조정되었다. 『균역사실』에는 급대처에 지급된 액수가 40여만 냥이라고 하나 『균역청사목』을 보면 균역법 시행 초기인 1752년(영조 28)에 이미 52만 냥을 넘고 있다. 1755년(영조 31)에 단행된 노비 신공(身貢)의 감필에 따른 급대마저 균역청이 담당하게 되고 이후로도 각 관청의 소소한 부족 경비까지 지원해 주게 됨으로써 그 액수는 점차 증가하였다. 그래서 『만기요람(萬機要覽)』을 보면, 1807년(순조 7)에는 급대 총액이 쌀 4만 2450석, 목면 487통(同) 26필(2만 4376필), 포(布) 53통 31필(268필), 전(錢) 40만 8410냥으로 총계가 60만 냥을 휠씬 상회하며 균역청 수입의 대부분이 소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균역법의 시행 이후 해당 관청에 미친 영향은 제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통제영의 경우 균역법의 실시로 역가와 어염세의 수입을 상실하면서 줄어든 재정으로 통제영의 급료 조달에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훈련도감에서는 다른 군영에 비하여 비교적 충실하게 급대 재원을 지원받았다. 요미와 군수 마련에 어려움을 겪던 훈련도감은 균역법 시행으로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병조의 경우 균역법의 실시로 병조 수입의 35%를 균역청에 의지하게 되어 재정 자립도는 약화되었으나 충실하게 보상을 받아 손실은 별로 크지 않았다.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지방 재정이었다. 지방 재정의 일부가 균역청 수입으로 이전되면서 각 지방에서는 재원 마련을 위한 추가 징수가 불가피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균역법의 성과는 조선 후기 사회의 현안 문제였던 양역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척결하는 개혁이 되지 못하였고, 감필을 통해 농민 부담을 약간 줄여준 데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당시의 군포 징수가 실제로는 매정 단위(每丁單位)가 아니고 촌읍 단위(村邑單位)였으므로 실제 혜택이 얼마만큼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른바 지역에서 관행으로 실시되는 공동 납부 형태의 동포제가 실시되면서 균역법 시행의 의의가 사라진 것이다. 균역법 실시 직후 바로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삼정(三政) 중의 하나로서 군정의 문란이 19세기 후반까지 그 폐단으로 지적되고 있는 점은 균역법의 성과가 크지 못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균역법은 종래 약간씩 차이가 나던 양역의 부담을 감필을 통해 1필로 균일화하였으며 선무군관을 통하여 피역자 가운데 조금이나마 양역을 지게 하여 불균등한 부역 부과를 시정하려 하였다. 특히 결미의 실시로 일부이기는 하나 막연한 노동력을 단위로 했던 인두세(人頭稅)가 실질적인 생산력을 가진 토지로 전환됨으로써, 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세금의 부과에 의하여 조세 징수의 합리성을 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차적이지만, 급대 재정(給代財政)의 마련을 위하여 전국적인 군역자 총액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도 그 성과로 평가된다. 한편 왕권과 양반 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관계가 얽힌 군역 문제 해결에 있어서 국왕의 경우 왕족에게 절수(折受)되었던 어염선세를 포기하게 하고, 양반 지주층에게 결미(結米)의 부담을 주면서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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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균역사실(均役事實)』
『양역실총(良役實總)』
『양역총수(良役總數)』
『균역청사목(均役廳事目)』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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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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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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