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포는 조선 후기 양역 변통책(良役變通策)의 하나로 제기되었던 토지 부과세이다. 결포론은 변통 논의의 진행 과정에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는 모든 양역을 토지에 부과하자는 순수한 결포론이다. 둘째는 양역을 2필에서 1필로 줄이고 나머지 1필 부분을 토지에 부과하자는 감필 결포론(減疋結布論)이다. 처음에는 전자가 우세했으나 나중에는 감필 결포론으로 진행되었다. 결포론은 그 주장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균역법에 영향을 주었고 그 기본 취지가 균역법에서 구현되었다.
수포 대역제(收布代役制) 실시 이후 군역을 대신하여 1년에 포 2필을 납부해야 하는 양정(良丁)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고, 임진 · 병자 양란 이후 급증한 군액을 지탱할 국가 재정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양역 변통책(良役變通策)의 하나로 호포(戶布) · 구전(口錢) · 유포(遊布) 등과 함께 결포론이 거론되었다.
결포론을 선구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김유(金楺, 1653~1719)였다. 그는 1715년(숙종 41) 경에 「결포사의(結布私議)」를 지어서 결포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김유는 당시 양역 변통의 방법론으로 제기되었던 유포론, 호포론, 구전론의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고, 자신의 견해인 결포론을 개진했다. 그는 예전에는 백성들이 경작지를 가지고 있어서 세금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며 백성의 담세 능력의 한계를 지적했다.
김유는 결포론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자문자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첫째, 이미 백성들이 전세, 대동미, 삼수량을 모두 토지에서 내고 있기 때문에 신역(身役)마저 결역(結役)으로 바꾸면 땅을 가진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에 답했다. 그는 일견 수긍하면서도 모든 담세 능력은 결국 땅에서 나오는 것임을 강조했다. 둘째, 인조조(仁祖朝)에 4결을 단위로 수포한 바 있었는데, 이를 두고 간신(諫臣)이 농민을 상하게 할 것이라고 비판했었다는 비판에 답했다. 그는 인조조의 결포는 전세나 신역 이외에 첩징결포(疊徵結布)한 것이라고 하였고, 결포론은 신역을 전역(田役)에 옮기는 것이므로 첩징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셋째, 만약 전결을 기준으로 출포하면 공인이나 상인이 세금을 피하게 된다는 지적에 답했다. 김유는 공인이나 상인은 토지 소유 여부를 떠나 그 업(業)으로 공(貢)에 충당하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넷째로 토지가 많은 삼남과 경기 등은 결포를 징수해도 여유가 있으나 황해도나 강원도 등은 그렇지 못하다는 지적에 대해 답했다. 그는 각 도에서 징수한 결포로 그 도의 군사를 양성하는 데 충당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땅 가진 사람이 포 내기를 꺼리면서 전결이 축소될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것은 감독하기 나름이라고 답했다.
1725년(경종 1)에는 이건명(李健命)이 결포에 관한 재정 개혁의 기본 틀을 제시하였다. 그는 모든 양역을 1필로 통일하고 그 재정 결손은 토지에 결포를 부과하여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임옥사(辛壬獄事)로 노론 정권이 붕괴되면서 이건명이 처형되자 그의 제안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1733년(영조 9)부터 이듬해까지 다시 감필 결포론이 크게 득세했다. 전라감사 조영로(趙榮魯)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시행 방안까지 거론하였다.
한편 경종 때의 정언 유복명(柳復明)과 영조 때의 좌참찬 권적(權𥛚, 1675~1755) 등은 결포 시행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미 대동미와 삼수미(三手米) · 저치미(儲置米) 및 제반 잡역이 전결을 단위로 부과되고 있어서 다시 전결에 결포를 부과하면 백성들의 부담이 너무 과중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유의 결포론은 그의 두 아들,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金若魯, 1694∼1753)와 영의정을 지낸 김상로(金尙魯, 1702∼1766)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이들 이외에도 조현명(趙顯命, 1690∼1752), 정우량(鄭羽良, 1692∼1754) 등도 결포론을 주장했으며 홍계희(洪啟禧, 1703~1771)도 결포론을 주장했다.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을 주도했던 홍계희는 처음에 호포론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결포론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양반을 포함한 백성의 전반적 빈곤화로 인하여, 이들이 호포론을 수용할 만한 담세 능력을 고루 갖지 못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해서 홍계희는 양역 폐단의 원인을 '역 부과의 불균과 응역자의 경제적 빈곤'으로 보았다.
결포론은 본래의 주장대로 온전히 실시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포의 관념이 균역법에 반영되어, 매년 양정 1인에게 포 한 필을 감해주는 데서 오는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결작미(結作米 : 또는 結作錢) 징수 조항이 마련되었다. 결포는 호포에 비해 그 부담이 적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호포와 결포는 당시까지 면역의 혜택을 받고 있던 양반층에게 역을 부과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양반 관료들은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결포는 부과 대상이 토지였기 때문에 당시 대토지를 소요했던 권세가들 입장에서 극히 불만스러운 양역 변통책으로 여겨졌고, 이들은 반대 의견을 강력히 제기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