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領議政)의 정원은 1인이다. 흔히 영상(領相)으로 불렸으며, 상상(上相) · 수규(首揆) · 원보(元輔)라고도 하였다. 영의정은 대개 좌의정을 역임한 원로대신이 임명되었으며, 좌의정 · 우의정과 함께 삼의정(三議政) 또는 삼정승이라 하였다.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았던 조선은 점차 관제를 정비하면서 최고 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都評議事司)를 1400년(정종 2) 4월에 의정부로 개편하고, 그 최고 관직을 영의정부사라 하였다. 이후 의정부의 기능이 점차 강화되고 관제가 정비됨에 따라 영의정 부사는 다시 영의정으로 개칭되어 직제로서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466년(세조 12)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따라 성문화되었다.
1436년(세종 18) 4월까지는 좌의정이 판이조사(判吏曹事), 우의정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각각 겸임해 문 · 무반의 인사를 관장하였다. 따라서 영의정은 외교문서의 고열(考閱)이나 사형수를 복심하는 정도의 업무를 관장하는 우대직으로 존속되었다. 그러나 1436년(세종 18) 세종은 황희(黃喜)가 영의정부사에 재직하자,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서사제도(署事制度)로 변경하였다. 6조의 업무를 의정부에 품의해 상의, 계문한 후 임금의 전지(傳旨)를 6조에 다시 하달하도록 하여 삼정승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따라서 영의정은 의정부의 수상으로서 서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뒤 삼정승은 6조로부터 올라오는 모든 공사를 심의하고, 국왕의 재가를 얻어 6조에 회송, 시행하도록 하였다. 다만 이조와 병조의 인사권과 병조의 군사 동원, 형조의 사형수 이하의 죄수에 대한 것만은 각 조(曹)의 직계제로 시행되었다. 법제적으로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규정되었지만, 실제의 기능은 왕권이 강하고 약함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한 예로, 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은 실권 없는 무력한 지위로 전락하였다. 이는 단종 때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세조의 행동을 크게 제약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성종과 중종 때에 여러 번 의정부의 서사를 회복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회복하지 못하였다.
1555년(명종 10) 비변사가 설치되고 나라의 중대사를 여기서 심의하면서부터 삼정승은 도제조(都提調)로서만 참가하기도 하였다. 영의정의 권한은 위에서와 같이 왕권의 강약, 의정부와 6조의 역학관계, 비변사의 설치, 그 뒤의 규장각의 운영, 당쟁과 세도정치의 진행, 각종 변란으로 인한 정치분위기 등과 연관되면서 부침을 계속하였다.
영의정은 정부의 수반인 최고 관직으로 조선시대를 통해 존속되어왔다. 마침내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의정부의 총리대신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후 내각총리대신 · 의정(議政) 등으로 개칭되었다. 영의정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비견되는 법제적 · 실권적 기능을 수행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