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명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치회(稚晦)
귀록(歸鹿), 녹옹(鹿翁)
시호
충효(忠孝)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0년(숙종 16)
사망 연도
1752년(영조 28)
본관
풍양(豊壤)
주요 관직
경상도관찰사|좌의정|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 · 녹옹(鹿翁). 조형(趙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이고, 아버지는 도사(都事) 조인수(趙仁壽)이다.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3년 (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주1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 · 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주2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 · 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주3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 · 부제학, 이조 · 병조 · 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 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 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주4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 · 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했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 · 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 환수, 결포제 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주5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주6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 · 송인영 · 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참고문헌

『경종실록』
『영조실록』
『국조방목』
『당의통략(黨議通略)』
「한국당쟁사」(성낙훈, 『한국문화사대계』 Ⅱ,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5)
「귀록 조현명 연구」(정만조, 『한국학논총』 8, 국민대학교, 1985)
주석
주1

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아우. 우리말샘

주2

조선 영조 4년(1728)에 이인좌의 난을 다스린 공으로 오명항 등 열다섯 사람에게 상으로 준 훈명(勳名). 뒤에 양무공신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3

굶주린 백성. 우리말샘

주4

나라의 일에 쓸 인부의 수효. 우리말샘

주5

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사람. 우리말샘

주6

홀을 큰 띠에 꽂는다는 뜻으로, 모든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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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정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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