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론 ()

조선시대사
단체
조선 후기 붕당의 한 정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소론은 조선 후기 붕당(朋黨)의 한 정파이다. 숙종대 경신환국 이후 서인의 소장파가 훈척의 정치 개입을 옹호하는 노장파를 배척하며 청론(淸論)을 주장하는 가운데 성립되었다. 그러나 소론은 서인의 정체성이 분명하였기에 노론과 대립하면서도 국왕과 남인 견제를 위해 협력하였다. 후대로 갈수록 소론은 반(反) 노론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숙종~영조대에 일시적으로 정국을 주도한 적도 있으나 대부분 비판 세력으로 존속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붕당의 한 정파.
연원

한태동 · 조지겸 · 박태보 등 소론의 주요 인사들은 산당과 대립하던 한양 거주 한당(漢黨) 가문이 연원이며, 이이- 김장생의 비교적 단일한 학통이 중심인 노론에 비하여 이이 · 성혼 · 신흠 · 최명길 등 다양한 학통을 연원으로 구성되었다.

서인 한당계는 성리학 이념보다는 시세 변화와 실무 역량을 중시하는 경향이었기에 주화론에 기울었고 다른 붕당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이들이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 이후 반(反) 훈척- 송시열 노선에서 소론으로 결집한 것이다. 여기에 오랫동안 송시열의 제자로서 산당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윤증이 가세하였다.

윤증은 송시열이 자임하는 북벌론 · 대명의리의 허위성, 타 정파를 배척하는 정국 운영, 주자 절대주의의 편협성 등을 비판하며 반(反) 노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산림의 역할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소론은 숙종의 전횡에 대해서는 노론과 함께 대항하였다. 소론은 숙종이 장희빈 소생을 성급히 원자로 정하고 인현왕후 폐비까지 추진하자, 이에 격렬히 항거하다가 박태보가 희생되는 등 노론과 더불어 서인 청론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또한 기사환국(1689년, 숙종 15)으로 관직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노론과 협력, 폐비 복위를 시도하여 숙종의 회심(悔心)에 의한 갑술환국(1694년, 숙종 20)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하였다.

소론은 남인에 포용적이었던 내력 때문에 기사환국 이후 노론에 비하여 심한 화를 겪지는 않았으나,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이 집권하는 데 기여하였다.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숙종이 노론과 소론 위주의 탕평으로 정국을 운영하자 소론은 노론과 정치 · 사상적으로 본격 경쟁하였다. 쟁점은 대(對) 남인 시책과 송시열이 자임해왔던 대명의리의 허위성에 대한 비판이었다.

남구만 · 윤지완 · 유상운 등 소론은 복위한 인현왕후를 저주해서 위협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장희빈 · 장희재를 세자 보호를 위하여 선처하자고 하거나, 폐비 등 무리한 처분들이 숙종의 뜻이었음을 들어 기사환국으로 되살아난 남인[기사남인]도 수용하고자 하였다. 이는 왕후에 대한 의리를 기준으로 장희빈 남매의 죄를 징토하고 기사남인을 배제할 것을 주장하는 노론과 충돌하였다. 당쟁은 사문 시비로도 확산되었다.

박세당이 송시열을 올빼미로 비난하자 노론이 그의 『사변록』을 사문난적으로 공격한 것, 윤증이 송시열을 "의(義)와 이(利)를 둘 다 행한다[義利雙行], 왕도(王道)와 패도(伯道)를 아울러 쓴다[王伯並用]"라고 비판하고, 부친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다며 변호하자 노론이 윤증의 배사와 효종에 대한 무함까지 문제 삼은 것, 노론이 최석정『예기유편』이 주자의 예론을 어지럽혔다며 훼판을 요구한 것 등은 그 사례이다.

이러한 전면적 당쟁의 양상에 대하여 숙종은 한동안 개입하지 않으면서 소론에 대한 우대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1704년(숙종 30) 전후 소론의 입지는 점점 약화되어 노론 위주로 탕평 정국이 운영되었다. 이는 세자 이외에도 연잉군 · 연령군이 성장하자 숙종의 세자 보호 의지가 약해진 것과 관련 있다.

결정적으로 1716년(숙종 42)의 병신처분에서 사문 시비에 전격 개입하여 송시열이 옳다는 판정이 내려졌고, 소론은 이에 항의하다가 환국까지 당하였다. 다음 해 숙종이 이이명과 독대 후 세자 대리청정을 결정하자, 소론은 노론이 숙종과 더불어 세자를 교체하려 한다고 강하게 의심하였다. 소론은 폐비 반대 때와 같이 청론을 자부하며 세자 보호를 위해 진력하여 경종 즉위에 기여하였다.

경종 즉위 후에도 소론은 노론이 세제(世弟) 책봉과 대리청정을 성급하고 비정상적으로 추진하자, 노론이 경종에게 역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였다. 소론은 경종의 국구로서 세제 대신 종친의 양자(養子)를 세우고자 하는 어유구(魚有龜)와 연계하여 대리청정을 저지하고 1721년(경종 1)의 신축년 환국을 통해 노론을 축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722년의 임인옥사는 김일경 등 소론 급진파가 세제 제거를 목표로 무리하게 진행하였는데, 이때 조태구 · 유봉휘 · 최석항 · 조태억 · 이광좌 등 소론 준론의 5대신도 노론 4대신과 그 자제들을 경종에 대한 역모 혐의로 제거하는 데 협력하였다.

조문명 · 송인명 · 조현명 등 소론 완론만 세제 보호를 위해 노력하였을 뿐이다. 소론은 급소(急少), 준소(峻少), 완소(緩少)로 분열되고 있었다. 급소 · 준소는 신축 · 임인옥사로 인하여 노론과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영조 즉위 초 김일경 일파 급소는 제거되었으며, 그 잔당은 남인과 함께 1728년(영조 4)에 무신란(戊申亂)을 일으켰다가 진압을 당하였다. 완소는 영조대 전반 탕평책에 적극 호응하며 노론과 신임의리의 충역론을 합의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는 ‘쌍거호대(雙擧互對: 양측을 임용하여 서로 맞먹게 함)`나 ’양시양비(兩是兩非: 양쪽이 다 옳거나 양쪽이 다 그르다는 함)’ 론으로 준소를 진출시켜 노론과 협력 · 대립 구도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영조대 전반에는 의리론의 잦은 변경을 불가피하였다.

영조는 소론 의리에 기반한 기유처분(1729년, 영조 5)을 경신처분(1740년, 영조 16)으로 수정하여 노론 의리에 기울더니, 소론 5대신에 대한 토역까지 유도하는 등 정국은 소론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1755년(영조 31)에는 완소의 고변으로 급소 잔당을 다스리기 위해 시작된 을해옥사에 준소 핵심이 다수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이로 인해 준소는 그간의 잘못된 신임의리관을 인정하고, 노론이 충(忠)이며 소론이 역(逆)이라는 국시가 확정되었다. 소론은 사문시비에 이어서 충역론(忠逆論)에서도 노론에 패배하였다.

이후 준소는 사도세자의 신임의리관을 문제삼아 세자 교체 여론을 조성하는 노 · 소론 탕평당과 노론 남당(南黨)에 맞서 이종성(李宗城) · 이이장(李彝章) 등을 중심으로 세자를 보호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는 임오화변(1762년, 영종 38)으로 인하여 좌절되었으나 세자 보호를 위한 준소의 충의는 정조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노 · 소론 탕평당보다는 노 · 준론과 남인까지 포함하는 의리탕평을 시행하였다. 준소는 정조의 의리탕평과 ‘영조의 임오의리’ 수정에 호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도세자 신원과 반(反) 세자 세력에 대한 토역론을 선도하며 노론 벽파와 정면 대결하였다. 반면에 완소는 준소와 달리 영조대 이래 노론과 협력하는 의리론을 고수하였다.

순조 초반 노론 벽파의 집권기에 준소는 사도세자를 추왕(追王)하는 세력으로 몰려 정국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그 뒤 노론 시파가 집권했을 때에도 세력을 만회할 수 없었다.

소론 가운데는 왕실과 인척 관계이거나 안동 김씨 세도가문과 유대가 있었던 동래 정씨, 달성 서씨, 경주 김씨, 반남 박씨, 경주이씨 가문 등 완소 성향의 경화 벌열가 위주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철종 대에는 준소 가운데 철종의 성장지인 강화도에서 명성이 높았던 강화학파의 전주 이씨 가문이 조정에 진출하였다.

고종이건창으로 대표되는 강화학파 소론은 『연려실기술』, 『당의통략』 등의 저술로 소론의 조선학을 정립하였고, 경주 이씨 이회영 일가와 연계하여 해외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등 충의(忠義)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의의 및 평가

소론은 서인이면서 반(反) 노론의 정치 의리를 기반으로 숙종대 이후 노론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며 붕당 · 탕평 정치 발달에 기여하였으나, 숙종 대 사문시비와 영조 대 충역의리에서 노론에 패배하였기 때문에 정치 · 사상을 주도하지 못하고 비판 세력에 머물렀다.

소론은 반노론의 기치로 시세에 따른 유연한 대처, 정치적 포용성과 학문적 자득(自得)을 강조하는 기풍을 보여주었으나, 이를 아우르는 체계적 의리론이나 척신과 연계된 인적 역량이 부족하였기에 노론의 공세에 끝내 패배하였다. 그러나 소론은 주자학과 의리론에 치우친 조선 후기의 정치 · 사상계에 양명학 · 노장학이나 실심 · 실학에 기반한 자득의 기풍을 더해 다채로움을 제공해 주었다.

참고문헌

원전

『경종실록』
『경종수정실록』
『당의통략』
『수문록(隨聞錄)』
『숙종실록』
『순조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단행본

최성환, 『영 · 정조대 탕평정치와 군신의리』(신구문화사, 2020).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지식산업사, 1997).
민영규, 『강화학 최후의 광경』(우반, 1994).
이성무 · 정만조,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이은순, 『조선후기당쟁사연구』(일조각, 1988).

논문

이상식, 「조선후기 숙종의 정국운영과 왕권 연구」(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05).
정만조, 「17세기 중반 한당의 정치활동과 국정운영론」(『한국문화』23, 1999).
김세봉, 「17세기 호서산림 연구」(단국대 박사학위논문, 1995).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성낙훈, 「한국당쟁사」(『한국문화사대계 2』,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65).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