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3년(숙종 9)에 생원이 되고 1686년 별시문과에 종제 태채와 함께 병과로 급제, 설서 · 문학 · 승지를 거쳐, 1702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05년 형조참의 · 대사성을 지냈다.
그 뒤 우참찬에 오르고, 1720년(경종 즉위년) 복상(卜相) 때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영의정은 김창집(金昌集), 좌의정은 이건명(李健命)이었다.
신임사화로 노론4대신을 사사(死賜)하게 한 뒤, 영의정에 올랐다. 1710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소론의 영수로서 노론과 대립하던 중 1721년 정언 이정소(李廷熽)의 건저상소(建儲上疏)와 김창집 · 조태채 · 이이명(李頤命) · 이건명 등 노론4대신의 주청에 의해 연잉군(延礽君)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유봉휘(柳鳳輝)에게 반대의 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후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시되자 최석항(崔錫恒) · 조태억 · 박태항(朴泰恒) · 이광좌(李光佐) · 한배하(韓配夏) · 이조(李肇) 등과 함께 이를 반대, 대리청정의 환수를 청하여 실현시켰다.
이어 같은 해 12월 전 승지 김일경(金一鏡)과 이진유(李眞儒) · 윤성시(尹聖時) · 박필몽(朴弼夢) · 서종하(徐宗廈) · 정해(鄭楷) · 이명의(李明誼) 등이 상소하여 건저(建儲)를 주장하던 노론4대신을 4흉(凶)으로 몰아 탄핵한 뒤 결국 4대신의 사사(死賜)를 관철시키고, 영의정에 올랐다. 이어 소론 정권을 수립, 최석항 · 김일경 등과 국론을 주도하였다.
이후 소론은 과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정책 결정에 논란이 많았는데, 그는 윤순(尹淳)과 함께 온건파의 주장이 되었다. 성격은 온아하고 위풍이 있었으며,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여 여러 번 외직에 나갔어도 재물을 쌓아두지 않았다. 다만 강인한 성격이 못 되어 남의 부탁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잘 다스렸다는 치성(治聲)은 얻지 못했다고 한다.
1725년(영조 1)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탄핵을 받고 관작이 추탈되었으며, 순종 때 복권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산법(算法)에 관계되는 책을 펴냈는데 양전(量田) 등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편서로 『주서관견(籌書管見)』이 있고, 글씨로는 <이충무공고하도유허비(李忠武公高下島遺墟碑)> · <왕자연령군명비(王子延齡君明碑)> · <완산백조구석비(完山伯趙龜錫碑)> · <길성군허유례비(吉城君許惟禮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