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심(士心). 박동열(朴東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호(朴濠)이고, 아버지는 박세해(朴世楷)이며, 어머니는 임위(林偉)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통덕랑(通德郞)으로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3년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보덕(輔德)·문학 등을 거쳐 1701년 사간원헌납(司諫院憲納)으로 있을 때에는 궁중의 절수(折受: 공공토지를 떼어서 차지함)의 폐단과 양남(兩南: 영남과 호남)의 급재(給災: 재해에 따른 구제책으로서의 물자지급)에 관한 소를 올려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1703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가 대마도(對馬島)와 교역하는 데 조정에 품의(稟議)하지 않고 전결(專決)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된 바도 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기용,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 승지·대사간·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예조참판으로 승진, 소론의 입장에서 세제(世弟: 뒤의 영조)책봉을 주장하는 노론을 적극 탄핵하였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삭탈관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좌참찬·좌찬성·예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