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항 ()

박태항 글씨
박태항 글씨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심(士心)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47년(인조 25)
사망 연도
1737년(영조 13)
본관
반남(潘南: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
주요 관직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우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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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심(士心). 박동열(朴東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호(朴濠)이고, 아버지는 박세해(朴世楷)이며, 어머니는 임위(林偉)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87년(숙종 13) 통덕랑(通德郞)으로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3년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보덕(輔德)·문학 등을 거쳐 1701년 사간원헌납(司諫院憲納)으로 있을 때에는 궁중의 절수(折受: 공공토지를 떼어서 차지함)의 폐단과 양남(兩南: 영남과 호남)의 급재(給災: 재해에 따른 구제책으로서의 물자지급)에 관한 소를 올려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1703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가 대마도(對馬島)와 교역하는 데 조정에 품의(稟議)하지 않고 전결(專決)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된 바도 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기용,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 승지·대사간·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예조참판으로 승진, 소론의 입장에서 세제(世弟: 뒤의 영조)책봉을 주장하는 노론을 적극 탄핵하였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삭탈관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좌참찬·좌찬성·예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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