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석 ()

조사석 글씨
조사석 글씨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공거(公擧)
만회(晩悔), 나계(蘿溪)
이칭
만휴(晩休), 향산(香山)
시호
충헌(忠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2년(인조 10)
사망 연도
1693년(숙종 19)
본관
양주(楊州)
주요 관직
예조판서|우의정|좌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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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공거(公擧), 호는 만회(晩悔) 또는 만휴(晩休) · 향산(香山) · 나계(蘿溪). 조남(趙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존성(趙存性)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다. 조태구(趙泰耉)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60년(현종 1) 진사가 되고, 166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의 관직과 주서 등을 거쳤다. 1666년 사관(史官)인 검열이 되고, 이어 봉교 · 겸설서로 승진하였다.

사관으로 있을 때인 1667년 왕이 지난해에 정태화(鄭太和) · 홍명하(洪命夏) · 허적(許積)을 탄핵한 이숙(李䎘) · 박증휘(朴增煇) 등 7명의 간관을 유배보내면서 사관들에게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지 말도록 명했으나, 왕의 거둥은 반드시 기록해야 하는 것이라며 거절하고 이를 사초에 기록하였다. 이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했으나, 파직의 왕명이 곧 철회됨으로써 복직되었다.

그 뒤 전적 · 정언 · 사서 · 지평 등을 거쳐 1672년 말에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동래에서 왜인을 접대하였다. 그 뒤 부교리 · 헌납 · 이조정랑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675년(숙종 1)에 수원부사를 거쳐 이후 황해도관찰사 · 예조참의 · 승지 · 강원도관찰사 · 충청도수사 · 경기도관찰사 · 이조참판 겸 수어사(守禦使) ·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68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대사헌 · 호조판서 · 강화유수 · 병조판서 · 판의금부사 · 우참찬 · 좌참찬 · 이조판서 등을 거쳐 168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그 사이 168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88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이 때 인조의 손자인 동평군 항(東平君杭)의 횡포를 논하다가 처벌된 박세채(朴世采), 남구만(南九萬) 등을 변호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다음해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이어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나, 1691년 전 해에 있었던 왕세자책봉하례에 참석하지 않은 죄로 고성(固城)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죽은 뒤인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대동편년(大東編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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