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흠 ()

상촌집 / 청창연담
상촌집 / 청창연담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예조참판, 자헌대부,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경숙(敬叔)
현헌(玄軒), 방옹(放翁)
이칭
상촌(象村), 현옹(玄翁)
시호
문정(文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6년(명종 21)
사망 연도
1628년(인조 6)
본관
평산(平山)
주요 관직
성균관학유|광주훈도|예문관봉교|병조좌랑|지평|사복시첨정|홍문관교리|동부승지|병조참지|가선대부|예조참판|자헌대부|예조판서
관련 사건
계축옥사
내용 요약

신흠은 조선시대 예조참판, 자헌대부,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66년(명종 21)에 태어나 1628년(인조 6)에 사망했다. 1585년에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6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1613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유배되었는데 인조가 즉위하면서 중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이정구·장유·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종통으로 칭송되고 있다.

정의
조선 중기에, 예조참판, 자헌대부,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 · 상촌(象村) · 현옹(玄翁) · 방옹(放翁). 증판서 신세경(申世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참찬 신영(申瑛)이고, 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다.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송인수(宋麟壽)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5년(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 정치적인 견해를 같이하는 집단 또는 사람)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그 뒤 곧 경원훈도(慶源訓導)로 나갔으며 광주훈도(廣州訓導)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다.

1589년 춘추관 관원에 뽑히면서 예문관봉교 · 사헌부감찰 ·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이어 주24 정철(鄭澈)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에 승진되었다.

1593년 주4에 체직, 당시 폭주하는 대명외교문서 제작의 필요와 함께 지제교(知製敎) · 승문원교감을 겸대하였다. 1594년 주5으로서 역적 송유진(宋儒眞)의 옥사를 다스리고 그 공로로 주1되면서 사복시첨정으로 승진했으며, 곧 집의(執義)에 초수(超授: 뛰어넘어 제수됨)되었다. 같은 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尹根壽)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군기시정에 제수되었다.

1595년 함경도어사와 의정부사인을 거쳐 주2 · 성균관사예(成均館詞藝) · 종부시정 ·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 홍문관교리 · 홍문관응교 · 의정부사인 ·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신익성(申翊聖)이 선조의 딸인 주3의 부마로 간택되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주6 겸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주7 · 우부승지 · 주8 · 주9 · 주10 · 주11를 역임하였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合纂)한 공으로 주12주13되고 곧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602년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주14에 발탁되었다.

이어서 주15 · 홍문관부제학 · 성균관대사성 · 도승지 · 예문관제학 · 병조참판 · 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04년에 주16에 오르면서 주17이 되었고, 그 뒤 주18 · 주19 · 상호군(上護軍) ·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애책문(宣祖哀冊文: 선조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짓고 한성부판윤 ·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공로로 주20가 되었으며,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 · 동지성균관사 · 주21을 겸대하였다.

그러나 1613년 주22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주23인 까닭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에의 가죄(加罪: 죄를 더함)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으며, 1621년에 사면되었다.

1623년(인조 즉위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 · 홍문관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죽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하여,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다.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사림의 신망을 받음은 물론, 이정구(李廷龜) · 장유(張維) ·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바른 종통)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 月沙 이정구, 象村 신흠, 谿谷 장유, 澤堂 이식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에 있다. 1651년(효종 2)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술활동

저서 및 편서로는 『상촌집』 · 『야언(野言)』 등과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 「낙민루기(樂民樓記)」 ·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월사집(月沙集)』
『지봉집(芝峯集)』
『상촌집(象村集)』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 또는 그 올린 품계. 왕의 즉위나 왕자의 탄생과 같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주로 행하였다.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장악원에 속한 정삼품 문관 벼슬.    우리말샘

주3

조선 선조의 딸(1587~1627). 인빈(仁嬪) 김씨(仁嬪)의 소생이며, 영의정을 지낸 신흠(申欽)의 아들 신익성(申翊聖)과 혼인하였다.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다.    우리말샘

주4

조선 시대에, 이조에 속한 정육품 벼슬. 정원은 2명으로 문관에서 임명했다.    우리말샘

주5

조선 시대에, 이조에 속한 정오품 벼슬. 정원은 2명으로 병조 전랑과 함께 인사 행정을 담당하였다.    우리말샘

주6

조선 시대에, 형조에 속한 정삼품 벼슬.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였다.    우리말샘

주7

조선 시대에, 병조에 속한 정삼품 벼슬. 정원은 1명이며, 병조 참의와 품계는 같지만 참의의 다음 자리이다. 주로 추고속과 유청군액속의 수납과 지출을 관장하였다.    우리말샘

주8

이조에 속한 정삼품의 당상관. 이조 참판의 아래이다.    우리말샘

주9

조선 시대에, 예조에 속하여 판서를 보좌하던 정삼품 당상 벼슬.    우리말샘

주10

조선 시대에 둔, 사간원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삼품으로, 임금에게 정사의 잘못을 간(諫)하는 일을 맡았다. 세조 12년(1466)에 사간대부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11

조선 시대에, 병조에 속한 정삼품 벼슬. 정원은 1명이며, 병조 참판과 병조 판서를 보좌하면서도 병조 판서와 대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말샘

주12

조선 시대에 둔, 종이품 문무관의 품계. 가의대부의 아래 급으로, 태조 1년(1392)에 설치하였으며 고종 2년(1865)부터 문무관, 종친,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썼다.    우리말샘

주13

직위가 정삼품 이상의 품계에 오르던 일.    우리말샘

주14

조선 시대에, 예조에 속하여 판서를 보좌하던 종이품 벼슬.    우리말샘

주15

조선 시대에, 병조의 버금 벼슬. 품계는 종이품이고, 정원은 1명이다.    우리말샘

주16

조선 시대에 둔, 정이품 문무관의 품계. 초기에는 문무관에게만 썼으나 고종 2년(1865)부터 종친, 의빈의 품계로도 썼다.    우리말샘

주17

조선 시대에, 한성부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이품이다.    우리말샘

주18

조선 시대에 둔, 병조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이품으로, 군사와 국방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다.    우리말샘

주19

조선 시대에 둔 예조의 으뜸 벼슬. 공양왕 원년(1389)에 예의판서를 고친 것으로 정이품 문관의 벼슬이다.    우리말샘

주20

조선 시대에 둔, 종일품 하(下) 문무관(文武官)의 품계. 고종 2년(1865)부터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에도 함께 쓰였다.    우리말샘

주21

조선 시대에, 예문관의 영예문관사 밑에서 실무를 맡아보던 정이품 벼슬.    우리말샘

주22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대북(大北)이 영창 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선조의 적자인 영창 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역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을 축출하였다.    우리말샘

주23

조선 시대에, 선조가 승하할 때 유명(遺命)을 내린, 신임하던 일곱 사람의 신하. 유영경, 한응인, 박동량,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 등을 이르며, 유명의 내용은 자기가 죽은 뒤에 어린 영창 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것이었다.    우리말샘

주24

조선 시대에, 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맡아보던 최고의 군직(軍職). 의정이 겸임하였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한충희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