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은 말 그대로 ‘선비들의 집단’, 곧 전근대 문무 관원과 유생을 포괄한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역사적 연원을 살펴보면 중국사에서 ‘사림’이라는 단어는 멀리 고대의 순(舜)임금이나 주나라의 무왕(武王)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 서기전 403∼서기전 221)와 동한(東漢, 25∼220)을 거쳐 명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한국사에서는 사림이 고려 중기부터 나타나는데, 1176년(명종 6) 최여해(崔汝諧)가 국자좨주(國子祭酒)에 임명되고,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게 되자 사림이 비웃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유학을 공부한 학자나 관원은 주로 유사(儒士)나 유신(儒臣)으로 불리다가 고려 후기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사대부(士大夫) · 사인(士人) · 사류(士類) · 사족(士族) 등 ‘사’를 강조한 표현이 자주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런 흐름과 함께 사림은 지배층을 포괄하는 용어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성리학이 보편화된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림’은 더욱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림’이라는 단어는 1,800여 회가 나오는데, 시기별로는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태조성종 때 160여 회(약 9%)가 사용되기 시작해 중기로 접어든 연산군현종 때 1,200여 회(약 67%)로 크게 증가하였다가 후기인 숙종~철종 때 440여 회(약 24%)가 나오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런 흐름은 연산군 때 이후 사화(士禍) · 동서분당(東西分黨) · 기축옥사(己丑獄事) · 예송(禮訟) · 환국(換局) 등 지배층 사이의 주요한 정치적 충돌이 전개되면서 그 용어가 자주 쓰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림’의 범주를 살펴보면 우선 문무 관원이 해당된다. 조정을 한 집안에 비유하면서 “국왕은 위에 계시는 부모이고 사림은 그 아래에 있는 형제”라는 기사들은 ‘사림’이 문무를 포괄한 조정 관원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선비’라는 의미를 담은 만큼 무반보다는 문반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가운데서도 이조(吏曹) · 병조전랑(兵曹正郞)이나 삼사 · 예문관(藝文館) 등 이른바 ‘청요직’을 맡은 관원은 좀 더 확실히 ‘사림’으로 공인받았던 것 같다. 이를테면 전랑은 “매우 중요하고 엄선해야 하는 사림의 관직”으로 자주 거론되었고 삼사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이런 의미의 연장선 위에서 ‘사림’은 대신(大臣)이나 재상과는 구별되는 부류로 여겨졌다. 이를테면 “재상과 사림은 둘이 아니다.”, “재상과 사림이 불화하고 있다.”, “재상은 사림을 자식이나 동생처럼 아낀다.”는 기록들은 ‘사림’이 대신 · 재상보다는 하위에 있고 상대적으로 젊은 관원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사림’의 모범이 되거나 존경을 받은 대신이나 정승도 있었고, 대신이 뜻을 펴지 않을까 걱정하거나 재신의 처벌에 반대하는 ‘사림’도 있었다는 기록은 둘이 대립하면서도 서로 보완하는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사림’의 의미는 조정 관원을 넘어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유생층으로 확대되었다. 이를테면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조정 관원과 사림이 모두 숙청되었다.”거나 “관원이 사림을 억제한다.” 같은 기사는 그런 측면을 잘 보여준다. 끝으로 외척과 잡과를 거쳐 진출한 의원 등 기술관이 소속된 중인층은 ‘사림’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도 덧붙일 만하다.
1970년대 이후 한국사 연구에서는 이런 전근대의 많은 용례 가운데 일부의 특징을 추출해 성리학에 많은 관심과 지식을 지닌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으로 성종 중반 이후 주로 삼사를 통해 중앙 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정치 세력으로 ‘사림’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사림’은 ‘ 훈구파’와 대립하면서 사화 등의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선조 초반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이런 견해는 한국사의 지배층의 변화와 발전을 단계적으로 선명하게 서술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른바 ‘훈구파’의 대립 세력으로서 ‘사림파’의 여러 특징을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단순하게 설정한 결과 실제의 모습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