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 사림’이라는 용어는 고려 중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조선 성종 · 연산군 때 이후 자주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흐름은 고려 후기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지배층의 사상적 인식이 깊어졌고, 조선 성종 · 연산군 때부터 사화 · 동서분당 · 기축옥사 · 예송논쟁 · 환국 등 지배층 사이의 정치적 충돌이 전개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근대에 사용된 ‘사림’이라는 용어는 외척과 중인층을 제외하고 문무 관원과 유생층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관원 가운데서는 무반보다는 문반을, 고위 대신보다는 이조 · 병조전랑, 삼사 · 예문관 등 ‘청요직(淸要職)’을 맡은 관원을 좀더 자주 지칭했지만 구체적인 정치적 지향이나 경제적 규모 등이 규정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포괄적으로 사용되던 ‘사림’이라는 용어는 근대 역사학이 시작되면서 정치 · 경제 · 사회 · 사상 등 여러 측면에서 특징적 면모가 규정돼 ‘사림파’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사림파의 여러 면모를 탐구하는 작업은 1970년대 이후 조선시대 연구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사림파’라는 용어는 1956년 이병도(李丙燾)의 개설서인 『국사대관(國史大觀)』에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조선 전기의 지배 세력을 훈구파 · 절의파 · 사림파 · 청담파(淸談派)로 나누고 그 특징을 설명했는데, 특히 사림파는 훈구파와 거의 모든 측면에서 대립적인 집단으로 서술하였다. 이런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구도는 그뒤의 학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림파 연구는 197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주목된 주제는 성종 때 추진된 유향소 복립과 향사례(鄕射禮) · 향음주례(鄕飮酒禮) 보급 운동이었다. 이런 현상은 향촌 지주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한 성리학이 조선에 조금씩 뿌리 내리면서 나타난 변화였으며,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지방에서 입지를 넓혀간 과정이라고 해석되었다.
그뒤 ‘사림파’는 중종 때 향약 · 『 소학』 보급과 명종 때 이후 서원 설립 등을 주도하면서 그 세력을 더욱 넓혀간 것으로 평가되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세종 말부터 문종 때에 걸쳐 추진된 사창제(社倉制)와 강남농법의 도입 등이 사림파의 형성과 맞물린 현상으로 주목되었다. 이런 연구를 거치면서 ‘사림파’의 사회경제적 면모는 ‘재지(在地)의 중소지주’로 규정되었다.
지역적 기반과 정치적 변화에 주목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사림파’는 처음 영남 지방에서 발원했지만 점차 기호(畿湖) 지방으로 확대됐다고 파악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성종 중반부터 위상이 높아진 비판적 언론기관인 삼사를 거점으로 중앙에 진출했으며,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 이어진 네 차례의 사화로 큰 시련을 겪었지만 그런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선조 초반 정치적 주류 세력이 됐다고 해석되었다. 그 결과 인조 때 이르러 사림 정치는 그 전형적 모습을 완성했다고 평가되었다.
요컨대 1970년대 이후 다양하게 추진된 연구의 결과, 사림파는 고려 후기 도입된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뿌리 내리면서 나타난 새로운 지배층으로 규정되었다. 그들은 강남농법의 보급으로 이뤄진 생산력 증대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유향소 복립, 향사례 · 향음주례 보급, 향약과 서원 설치 등의 사회적 · 사상적 운동을 전개하면서 ‘재지의 중소지주’로 성장하고 외연을 넓혀갔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측면에서는 성종 중반부터 위상이 강화된 삼사를 거점으로 중앙에 진출해 기존의 ‘훈구파’와 대립하기 시작했고, 네 차례의 사화로 대표되는 시련을 겪었지만 끝내 그것을 극복하고 선조 초반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연구들은 지배층 교체와 역사 발전을 정합해 설명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전개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이후 제기된 식민사학을 비판하고 발전적이고 체계적인 역사상을 수립하는 데 중요하게 공헌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충분히 실증되지 않은 개념에 입각해 여러 사실을 설명하거나 실제와 괴리되는 현상들을 논리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일찍이 1980년대 초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인 에드워드 와그너는 한국 사회의 혈연적 · 가문적 연속성과 사회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지배층이 나타나기는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사림파’라는 개념은 사상적 변화라는 측면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재지의 중소지주’라는 개념도 그 범위와 실제 규모가 모호하거나 실제와 괴리된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언론기관인 삼사를 중심으로 조정에 진출해 ‘훈구파’를 비판하면서 입지를 넓혀 갔다는 해석 또한 삼사와 대신은 『 경국대전』에 규정된 직무가 서로 다르고 둘의 관직 체계는 서로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측면을 간과했다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사림파 연구는 기존의 성과와 이런 반론을 종합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