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는 조선 전기 조신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입은 정치적 사건이다. 발생한 해의 간지를 따라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로 불린다. 1970년대 이후 현대 한국사 연구에서는 ‘훈구파(勳舊派)’가 ‘사림파(士林派)’를 탄압한 사건으로 평가해 왔으며, 1990년대부터는 대간(臺諫)의 활동과 위상 변화에 초점을 맞춰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네 차례의 사화는 조선이 건국된 뒤 한 세기 만에 일어난 주요한 정치적 충돌이자 숙청이었다. 정치적 충돌과 숙청은 중앙 정치에서 늘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사화(士禍)’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여러 차례의 사건이 묶인 것은 조선이 개창된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화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상황적 배경은 1475년(성종 8) 『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최종적으로 반포되고, 20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첫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길고 힘든 과정을 거쳐 국법이 완성돼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지만, 곧 커다란 정치적 충돌과 숙청이 잇따라 발생했다는 모순적 상황은 사화를 이해하는 데 깊이 고려해야 할 상황적 맥락으로 지적된다. 이런 측면은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일어난 실험과 조정, 반발과 마찰이 사화의 주요 원인이었음을 알려 준다.
『경국대전』의 완성은 관직 제도의 정비와 관련해 큰 의미를 지녔다. 특히 중요한 관서는 대간(臺諫)이었다. 국왕에 대한 간쟁과 주로 대신인 관원에 대한 탄핵이라는 기능이 『경국대전』에 명시됨으로써 대간은 비판적 언론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견고한 제도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지배층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훈구 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군의 집단이 형성된 것이었다. 본래 ‘원훈구신(元勳舊臣)’이라는 의미를 지닌 훈구 대신은 세조 때부터 거듭 공신에 책봉되고 오랫동안 주요 관직을 독점하면서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의 위상은 세조가 붕어(崩御)하고 예종을 거쳐 성종이 즉위한 무렵에는 왕권에 상당한 부담이 될 정도로 높아졌다.
성종은 재위 7년까지 자성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과 주요 대신으로 구성된 원상제(元喪制)를 거친 뒤에야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성종의 우선적 과제는 왕권을 정상적으로 행사하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먼저 훈구 대신의 영향력을 제어해야 하였다. 성종은 대간의 언론 활동을 지원해 대신을 비판하게 하고 자신의 왕권도 강화하였다.
그 결과 성종 중반 이후 중앙 정치의 권력 구도는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대신과 대간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 보장된 탄핵과 간쟁을 용인한 결과 대간은 계속 영향력을 키웠고, 성종이 치세를 마치기 직전에는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다.”고 평가될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
연산군(燕山君)은 신하는 물론 국왕의 행동까지 심각하게 제어하는 대간의 활동을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전제 왕권의 수립과 행사를 궁극적 목표로 삼은 연산군은 국왕의 행동을 제약하는 모든 행위를 ‘능상(凌上)’으로 규정하였다. 그런 ‘능상’을 가장 빈번하고 심각하게 저지른 집단은 대간이었다.
즉위 직후부터 무오사화(戊午史禍)까지 연산군과 대간은 수륙재(水陸齋) 실시, 폐모 추숭 등 여러 문제에서 대립하였다.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을 포함한 주요 대신이 연산군을 옹호하면서 대신과 대간의 충돌도 격화하였다. 무오사화 1년 전인 1497년(연산군 3) 7월 21일 30세인 정언 조순(趙舜)이 70세인 전 영의정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한 극단적인 발언은 그런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적 맥락에서 1498년(연산군 4) 7월 1일 첫 사화인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발단은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세조와 관련된 불충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혐의가 알려진 것이었다. 유자광(柳子光)은 김종직(金宗直)의 「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라고 고발하였다.
무오사화는 한 달 만에 마무리돼 52명이 처벌되었다. 피화인을 형량에 따라 살펴보면 사형 6명, 유배 31명, 파직 · 좌천 등 15명이었다. 인적 구성은 김종직 관련 24명, 언관(言官) 9명, 실록 편찬 관련 8명이었다. 한 달 만에 사건이 종결되었고 사형도 많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무오사화는 제한적 규모의 숙청으로 평가된다.
대규모의 본격적 숙청은 6년 뒤 갑자사화(甲子士禍)에서 일어났다. 무오사화 이후 왕권을 강화한 연산군은 사치 · 음행 등의 폭정을 본격적으로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대간은 물론 대신들도 국왕의 패행을 비판하면서 연산군은 ‘능상’이 모든 신하들에게 만연했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503년(연산군 9) 9월 이세좌(李世佐)가 양로연(養老宴)에서 어의에 술을 엎지르고, 이듬해 3월 홍귀달(洪貴達)이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따르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두 사람 모두 앞서 폐비 윤씨 사건과 연관됐다는 공교로운 우연이 겹치면서 갑자사화가 시작되었다.
갑자사화에서는 239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피화하였고, 사형이 122명으로 절반을 넘었다. 대신은 20명, 삼사는 92명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당시의 주요 대신인 이극균(李克均) · 이세좌 · 윤필상(尹弼商) · 성준(成俊) · 한치형(韓致亨) · 어세겸(魚世謙)이 ‘갑자육간(甲子六奸)’으로 지목되고 앞 시기를 대표하는 훈신인 한명회(韓明澮) · 정창손(鄭昌孫) · 심회(沈澮) · 이파(李坡) 등도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이런 폭정의 결과 연산군은 1506년(중종 즉위년) 9월 반정으로 폐위되고 중종이 추대되었다. 반정 직후 그때까지의 공신 가운데 가장 많은 104명의 정국(靖國)공신이 책봉되었다. 거기에는 반정에 별다른 공로가 없거나 연산군에게 협력한 인물도 적지 않게 포함되었는데, 이런 문제는 그뒤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중종 초반의 국정은 박원종(朴元宗) · 성희안(成希顔) · 유순정(柳順汀)을 중심으로 한 공신들이 주도하였지만, 1515년(중종 14) 6월 조광조(趙光祖)가 등용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조광조를 비롯해 김정(金淨) · 김구(金絿) · 김식(金湜) · 기준(奇遵) · 박세희(朴世熹) · 박훈(朴薰) 등의 기묘사림(己卯士林)은 주로 대간에 재직하면서 강력한 개혁을 추구하였다.
핵심은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정국공신 가운데 문제 있는 부류를 삭훈(削勳)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 조처는 기존 세력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중종도 기묘사림의 개혁에 피로와 불안을 느꼈다.
1519년(중종 14) 11월 일어난 기묘사화의 본질은 명확하였다. 그것은 국왕과 일부 대신이 삼사를 거점으로 일련의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던 신진 관원들을 숙청한 사건이었다. 한 달 뒤 조광조가 사사되고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 등은 외딴 섬이나 변방에 안치되면서 기묘사화는 마무리되었다.
네 번째 사화인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인종과 명종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인종의 외숙인 대윤 윤임(尹任)과 명종의 외숙인 소윤 윤원형(尹元衡)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붕어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 · 이기(李芑) · 정순붕(鄭順朋) 등 소윤의 주요 인물은 윤임이 명종 대신 다른 인물을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유관(柳灌) · 유인숙(柳仁淑) 등이 이 일에 협력했다고 탄핵하였다.
그뒤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 등도 그런 역모를 알고 있었다는 고발이 제기되었다. 을사사화는 윤임 · 유관 등 대윤의 주요 인물이 처형되고, 28명의 위사(衛社)공신이 책봉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을사사화의 피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고, 더 큰 옥사는 2년 뒤 양재역 벽서사건(壁書事件)을 기화로 한 정미사화(丁未士禍)에서 일어났다.
조선 전기의 네 사화는 동일한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개별적 성격은 서로 달랐다. 무오사화 · 기묘사화는 국왕과 대신이 한편에 서서 신진 관원을 숙청한 사건이었고, 갑자사화는 국왕이 일방적으로 가혹한 폭정을 자행한 사태였다. 을사사화는 외척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하들 사이의 대립이었다.
기묘사화까지 세 사화를 관통한 주제는 대간이었다. 갑자사화는 조금 달랐지만, 갈등과 충돌은 『경국대전』에 보장된 대간의 기능이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과 범위를 둘러싸고 촉발되었다.
사화의 발발과 전개에 국왕이 중요한 영향을 행사하였고, 을사사화에서는 대리청정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중요한 영향을 행사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서 연산군의 역할과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서의 중종의 밀지(密旨)와 문정왕후의 처결은 사건을 주도한 핵심적 동력이었다.
그동안 주류적 학설이었던 ‘ 훈구파’와 ‘ 사림파’의 대립은 물론 국왕과 삼사의 역할에 주목해 사화를 실증적이고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으며, 그런 방향으로 연구가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