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형지(馨之), 호는 강수(江叟). 좌찬성 박중손(朴仲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박미(朴楣)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박증영(朴增榮)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영달(朴英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06년 천거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를 거쳐,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외지로 나갔다. 그러나 어진이를 임금 곁에 두지 않고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여론에 따라 사헌부감찰로 바뀌었다가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사간원사간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까지 올라 ‘국기(國器: 나라에 인재가 될만한 그릇)’라는 명성을 들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성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의주로 옮겨졌다가, 13년 뒤에 안악으로 옮겨졌다. 3년 뒤인 1533년에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향리인 청주에 은거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상주노릇을 너무 슬프게 하다 병을 얻어 일생을 마쳤다. 효심뿐 아니라 성품과 자질이 순수하고 덕행과 기량이 자연히 이루어져 행동에 지조가 굳고 법도가 있었다. 또 마음에 있지 않아도 관대하고 화합하는 도량도 갖추었다.
당대 큰 선비들과 두루 사귀었고, 특히 조광조와는 가장 친하였다. 조광조가 도목정사(都目政事: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매기던 제도) 때 박훈의 의견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내칠 정도였다 한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에 제향되었으며,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저서로는 『강수유고(江搜遺稿)』 2권 2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