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상은 조선 전기 좌찬성,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27년(세종 9)에 태어나 1504년(연산군 10)에 사망했다. 1447년에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세조가 즉위하고 원공공신 2등에 채록되었고, 세조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세조 사후에 좌리공신에 책봉되었다. 1479년 우의정으로 서정도원수로 뽑혀 건주위를 토벌하는 전공을 세웠다. 연산군에게 궤장을 하사받는 영예를 누리었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중종반정 때에 신원되었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를 거쳐 1450년 추장 문과(秋場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1453년(단종 1) 저작이 되었고, 1455년(세조 1) 호조좌랑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된 뒤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457년 중시에 급제했으며, 1463년 동부승지가 된 뒤 형방승지 · 도승지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의 측근에서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특히, 형방승지로 있을 때 날씨가 매우 춥자 서울과 지방에 있는 죄수들을 낱낱이 상고해 작은 책자에 기록해 두었다가, 세조의 죄수 현황을 묻자 즉시 응답해 큰 신임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계속 승진했으며,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히 처리해 우참찬에 특배되고,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녹훈되어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강순(康純) 등이 파저강(婆猪江) 주위의 야인을 토벌할 때 왕명을 받고 진군에 가서 개선군들을 위유(慰諭)하였다. 이듬해는 원접사(遠接使)인 안주선위사(安州宣慰使)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이 해에 세조가 죽자 수묘관(守墓官)으로 능을 3년간이나 지켰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다.
1471년(성종 2) 우찬성으로 재직시 경상도에 가뭄이 들어 기근이 심하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기민을 구제했고, 다시 경상도관찰사를 겸해 이듬해까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한 공으로 모의(毛衣) · 녹비화〔鹿皮靴〕를 하사받았다. 그 뒤 1474년에는 이조판서 · 의금부당상을 겸직하다가 한명회(韓明澮) · 노사신(盧思愼) 등 권신들이 전권을 오로지하면서, 이조의 권한인 인사권까지 침해하므로 이에 분개해 사직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77년에는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사복을 채웠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이 해 다시 풀려 나와 좌찬성이 되고,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건주위(建州衛)의 야인들을 자세히 탐지, 보고했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479년 명나라에서 야인을 치려고 조선에 군사를 요청하자 어유소(魚有沼)를 도원수로 하여 정벌군을 보냈으나, 어유소의 군대가 얼음이 녹아 강을 건널 수 없다는 이유로 되돌아왔다. 일이 급박해지자 한명회 등이 다시 정벌군을 뽑아 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윤필상은 우의정으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로 뽑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건주위를 토벌, 큰 전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1481년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4년에는 영의정이 되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496년(연산군 2)에는 궤장(几杖)을 하사받는 영예를 누렸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지난 성종 때에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의 폐위를 막지 않았다고 추죄(追罪)되어, 진원(珍原)의 유배지에서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 뒤 중종반정 때에 신원되었다. 국사를 의논할 때 임금의 뜻에만 영합했다는 비판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