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태초(太初). 증조부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이다.
갑사(甲士)로 벼슬에 나가 무관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첨지중추원사로 있다가, 북방 야인을 다스리기 위해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박천에 나가 북방의 방어에 전념하게 되었다. 1454년(단종 2) 회령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를 거쳐 판의주목사로 전임되었다가, 1458년(세조 4) 다시 첨지중추원사로 복귀해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0년(세조 6) 판길주목사로 부임했다가 새로 설치된 영북진(寧北鎭)의 도호부사로 전임되어 진(鎭)의 성을 쌓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 뒤 신숙주(申叔舟)의 모련위야인정벌(毛憐衛野人征伐)에 종군해 공을 세우고, 자헌대부에 올라 종성절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뒤, 1465년(세조 11) 중추원사로 전임될 때까지 5년 가까이 북방 방어에 힘쓰면서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세조는 북방 방어에 노력하는 노고를 덜어주려고 처와 함께 부임하도록 특명하였다.
또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을 때는 임기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믿고 교대시킬 더 좋은 인물이 없음을 들어 그대로 유임시키기도 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평안도 병사를 이끌고 어유소(魚有沼) · 남이(南怡) 등과 함께 홍원(洪原) · 북청(北靑) · 만령(蔓嶺) 등지에서 반란군을 격파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1등에 녹훈되고 우의정 산양군(山陽君)에 제수되었다.
이어 서정장군(西征將軍)으로 남이 · 어유소 등과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建州衛)의 동북쪽 파저강(婆猪江)올미부(兀彌部)의 여러 곳을 소탕하고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죽이는 등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명나라 헌종(憲宗)으로부터 은 20냥과 비단을 하사받았다.
1468년(세조 14) 7월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예종 즉위년) 10월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일어난 남이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당하였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건의로 누명이 풀리고 관작이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