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병조참의, 도총부도총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미중(美仲)
기천(岐川)
시호
정희(靖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7년(명종 22)
사망 연도
1664년(현종 5)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분병조참의(分兵曹參議)|도총부도총관|이천부사|공조참판
관련 사건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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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병조참의, 도총부도총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미중(美仲), 호는 기천(岐川). 윤무(尹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돈인(尹敦仁)이다. 아버지는 상호군 윤대로(尹大老)이며, 어머니는 이원록(李元祿)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0년 주서를 지내고 예조좌랑·지평·공조정랑을 거쳐 1605년 평양부서윤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죽주부사를 지낼 때는 임기가 끝났으나 민원으로 1년 더 유임하였다.

분승지(分承旨)·분병조참의(分兵曹參議)로 있을 때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참여하지 않아 파직되어 양근에 은거하였다. 1621년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모문룡(毛文龍)을 맞으러 가도(椵島)에 건너갔다.

1623년(인조 1) 해주목사가 되었고 이듬 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인솔하고 관찰사를 따라 종군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왕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피란하였다. 뒤에 장례원판결사가 되어 사무를 신속히 처결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할 때 사태가 위급해지자 모두 도망쳤으나, 윤경은 태연하게 인장과 문서를 보관하고 보통 때와 같이 정사를 처리했다 한다.

난이 끝난 뒤 그 공로로 병조참의에 임명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다시 도총부도총관을 거쳐 이천부사를 역임하고 사임한 뒤 해주에 내려갔다. 1645년 공조참판에 오르고 이듬 해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56년(효종 7) 90세의 나이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공조판서가 되고 1660년(현종 1)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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