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 할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고, 아버지는 김반(金槃)이며, 어머니는 서주(徐澍)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에 등용되었다.
같은 해 검열을 거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635년 수찬(修撰)·사서(司書)를 거쳐,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자로서 청나라와의 화평을 반대하며, 왕을 남한산성에 모시고 가서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1637년 교리(校理)·집의(執義)를 거쳐 1639년 이조좌랑이 되고, 1642년 사간이 되었다. 1653년 부제학으로서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 드릴 것을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듬해 김익희의 주장으로 사학(四學)에 교수 각 1인을 겸교수라 일컫고 시종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1655년 대사성·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대제학이 되었다. 1708년(숙종 34) 손자 김진옥(金鎭玉)이 김익희의 글을 모아 『창주유고(滄洲遺稿)』를 간행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