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득화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대사헌,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덕휘(德輝)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8년(숙종 14)
사망 연도
1759년(영조 35)
본관
해평(海平,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주요 관직
호조참의|강화유수|대사헌|예조참판|개성유수|강원도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대사헌,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덕휘(德輝). 윤게(尹垍)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세휴(尹世休)이다. 아버지는 금천현감 윤상명(尹商明)이며, 어머니는 전라도관찰사 김징(金澄)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5년(영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723년 송시열(宋時烈)과 제자 윤증(尹拯)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였는데, 왕이 윤증을 지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다가 파면되었다.

이듬해 병조좌랑으로 서용되고 지평을 거쳐, 1729년에는 사서로 재상 조문명(趙文命) 등의 탕평론에 반대하여 영조의 탕평정책에 해가 적지 않았다.

1731년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지평이 되고, 수찬을 거쳐 부교리로 있을 때 이광좌(李光佐)의 죄를 논하다가 갑산에 유배된 민형수(閔亨洙)를 변호하여 다시 고원군수로 좌천되었다. 곧 교리로 발탁되어 한학교수를 겸하였다.

이어 호조참의·관찰사·대사간·좌부승지·대사성·도승지·강화유수 등을 거쳐 대사헌이 되자, 권신 송인명(宋寅明)이 사사롭게 당을 부식한다고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오랜 뒤에 예조참판이 되고, 개성유수·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대사헌에 이르러 죽었다.

안광이 형형하여 능히 백보 밖의 것을 보았으며, 특히 송시열을 사모하여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죄를 규명하는 소를 포의(布衣)의 몸으로 올려 숙종을 깨우치기도 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높았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강한집(江漢集)』
집필자
유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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