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수는 외적 방어, 국외 원정, 내란 진압 등과 같이 전시, 또는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관하 군대를 영솔하기 위해 2품 이상의 문신이 임명 · 파견되었던 임시 관직이다.
도원수는 외적 방어, 국외 원정, 내란 진압 등이 이루어질 때 관하 군대를 총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토벌할 때에 부원수는 선봉(先鋒)으로 전투를 지휘하였고, 도원수는 계략이 있는 사람으로 뒤에서 막으며 호령(號令)을 맡았다. 따라서 부원수(副元帥)는 반드시 무신(武臣)으로 임명해야 되지만, 도원수(都元帥)는 문약하여도 할 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개 해당 지역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유장(儒將)을 도원수로 임명하였다. 도원수는 군대를 총 지휘하면서 해당 지역의 모든 수령과 변장들도 그의 지시에 복종하게 함으로써 방면 사령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고려 후기에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원정할 때, 고려의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무신)을 관고려군도원수(管高麗軍都元帥)로 삼아 원나라의 원수(元帥) 흔독(欣篤) · 다구(茶丘) 등을 따라 출정(出征)한 일이 있었다. 고려 말에는 1359년(공민왕 8) 홍건적(紅巾賊)의 침략에 대비하여 수문하시중 이암(李巖)(문신)을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삼았다가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으로 교체하였다. 1380년(우왕 6)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벌어진 진포 전투에 심덕부(문신)가 도원수, 나세가 상원수, 최무선이 부원수, 이성계가 병마도원수로 참전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1479년(성종 10)에 명(明)나라에서 조선의 힘을 빌려 건주 위야인(建州衛野人)을 정벌할 때에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명나라를 도왔는데, 이를 ‘평안도도원수(平安道都元帥)’ 또는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라고 불렀다. 1491년(성종 22)에는 허종과 이극균(李克均)을 동시에 도원수에 임명하여, 각각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라고 일컬었다. 이후 1499년(연산군 5)의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 성준(成俊)의 사례가 있고, 1510년(중종 5)에는 삼포왜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면서 처음에는 성희안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가, 다시 유순정(柳順汀)으로 교체하였는데 이때 유순정의 직함은 '좌의정겸경상도도원수(兼慶尙道都元帥)'였다. 1543년(중종 38)에는 명나라의 청병 요청과 서변(西邊) 정토(征討)를 대비하여 이기(李芑)를 도원수로 임명했던 사례도 있다.
1592년(선조 25)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원수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처음에는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에 임명했다가, 다음 해(1593)부터 1599년(선조 32)까지 권율(權慄)이 도원수가 되어 진두지휘하였다. 이후에는 1600년(선조 33)에 이항복(李恒福)이 좌의정으로 사도체찰사겸도원수(四道體察使兼都元帥)가 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한준겸(韓浚謙)이 겸사도도원수(兼四道都元帥)가 되었다. 1618년(광해 10)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당시 만주 일대에서 흥기하고 있던 후금을 정벌하기 위해 출동하면서 의정부좌참찬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았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장만(張晩)을 도원수에 임명하여 원수부를 평양에 두고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원수(元帥) 장만이 적의 후미에 있으므로 한수(漢水) 이남은 호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조참판 심기원(沈器遠)을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로 삼았다.
1631년(인조 9)에는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던 병조판서 김시양(金時讓)을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삼았다가, 이후 4도체찰사로 전임시켰고 다시 1633년(인조 11)에는 4도도원수로 전임시켰다. 한편 1633년(인조 11)에는 김자점(金自點)을 서로도원수(西路都元帥)로 삼았으며, 병자호란 발발로 전쟁 중에는 김자점을 서로도원수로, 심기원(沈器遠)을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로, 윤숙(尹璛)을 부원수로 삼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도원수 제도가 더 이상 운영되지 않았다.
도원수 제도는 고려 말부터 병자호란 시기까지 운영되었다. 무신을 부원수로 임명한 것과는 달리 문신의 유장을 도원수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문신이 군사 통솔권을 장악하고 있던 문치주의 사회 조선 왕조의 특성을 반영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