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둔도 사건은 1587년(선조 20)에 조선과 여진족이 녹둔도에서 별였던 전투이다. 녹둔도는 세종의 6진 개척 이후 조선의 영토에 편입된 지역으로, 선조 대에 둔전을 개간하여 경작하는 과정에서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족의 한 부족인 올적합(兀狄哈)이 인근의 여진족과 연합하여 대대적인 침략을 단행하였다. 이곳을 지키던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이순신은 전투 초반에는 공격을 허용하였으나, 후반에는 마침내 여진족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녹둔도의 둔전 경영은 취소되고, 이순신은 한때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녹둔도(鹿屯島)는 두만강 이북 여진족들의 침입을 예측할 수 있는 군사 전초 기지이자 둔전(屯田)을 통해 상당한 군량을 확보할 수 있는 병참 기지로서 조선 전기부터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세종의 6진 개척 이후 조선의 영토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녹둔도는 들판이 100여 리가 될 정도로 넓었으며, 전답역시 기름졌다. 성종 대에는 봄이 되면 조산의 군사와 백성이 녹둔도에 들어가 농사짓고, 수확을 하고 난 후 조산보(造山堡)로 다시 돌아와 방수(防守)하였다. 해마다 풍년이 들어 변경 지역 군사들의 식량이 넉넉했다고 한다.
조산보에서 녹둔도로 나가려면 반드시 배를 타야만 했는데, 매우 고생스러워 백성이 차라리 녹둔도에 거주하면서 방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조정은 여진족의 변란에 대비하기에 한계가 있어서 이러한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종 대와 중종 대에는 녹둔도에서의 경작과 방어에 대한 허락과 금지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그리고 명종 대에 이응거도(伊應巨島)의 분쟁으로 인해 경작이 중단된 녹둔도를 선조 대에 들어 둔전을 재개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에 있었던 여진 번호(藩胡)를 축출하였다. 이에 이들은 조선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인근의 여진들과 연합하여 녹둔도에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1583년(선조 16) 군량미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함경도관찰사 정언신(鄭彦信)가 녹둔도에 처음으로 둔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586년(선조 19)에는 선전관 김경눌(金景訥)이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으로 왔는데, 그는 녹둔도 가운데에 목책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남도의 군역에서 빠진 군병을 농부로 예속시켜 개간하고 씨를 뿌리며 작물을 심게 했다.
1587년(선조 20)에는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이순신(李舜臣)이 녹둔도의 둔전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9월 24일 부사 이경록(李景祿)이 일꾼인 연호군(煙戶軍)을 데려다가 수확하려고 할 때, 올적합이 녹둔도를 침범하여 사람들을 잡아가고 가축들을 약탈해 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산보만호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군은 전투 초반에 여진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전투가 발생하기 전에 진영 주변에 참호와 목책 등의 장애물이 이미 구축되어 있었고, 전투 중에는 이순신이 이를 활용하여 적절한 궁시 사격 위치를 선정한 덕분에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 냈다. 또한 여진의 번호들은 수적으로 우세하였으나 진영 밖에 있었던 조선군의 군사 행동으로 인해 군사력을 집중시키지 못하였고, 더욱이 공격을 주도한 추도의 마니응개(亇尼應介)가 사살됨으로써 여진족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군은 비록 군사력의 열세로 상당한 수의 백성들이 여진의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여진의 공격을 격퇴함으로써 녹둔도를 지켜 낼 수 있었다. 참혹한 소식을 접한 선조는 매우 원통해 하였으며, 특히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포로들을 찾아오라고 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녹둔도의 둔전 경영은 취소되고, 당시 조산보만호 이순신은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후 선조는 북변사(北邊使) 이일(李鎰)에게 명하여 녹둔도를 침략한 시전(時錢) 부락을 정벌하도록 했으며, 1588년(선조 21) 1월 14일 이일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여진에 대한 대대적인 응징을 단행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때 백의종군했던 이순신도 크게 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