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7년(세조 3) 어가(御駕) 앞에서 훈도(訓導)하는 임무를 맡은 무관을 선전관이라고 일컫게 됨으로써 비로소 그 관직이 처음 생겼다.
이 때 왕과 가까이에 형명이 있는 곳에 서도록 되어 있었던 선전관은 모두 15인이었는데, 이들이 3교대로 5인씩 입직(入直)하여 근무하였으며, 당번 때에는 사정전(思政殿)의 문 안에서 직숙(直宿)하여야 했다.
그러나『경국대전』에는 체아(遞兒) 수록(受祿)하는 8인의 선전관이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그 뒤 선전관청(宣傳官廳)이 설치되고 선전관은 정직(正職)으로 되면서 20인 남짓한 원수를 유지하는데, 이들 전임(專任)의 선전관 이외에 문관과 무관이 겸직하는 겸선전관이 50인 남짓 있었다.
선전관은 근시(近侍)의 직임을 가지므로 서반승지(西班承旨)로 지목되어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선전관 가운데 당상관·당하관을 막론하고 4인을 승전기(承傳岐)로 정하여 전명을 전담시켰는데, 그들은 6개월 만에 전직되도록 되어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 존재였다.
한편, 선전관은 장차 무반의 중추적 존재로 성장할 인재들이라는 점에서 무재(武才)가 있고 효용(驍勇 : 굳세고 용맹함)한 사람을 뽑아 임명하고, 끊임없이 무예와 병법을 연마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선전관에 임명되는 사람은 승진(陞進)과 가계(加階)에 상당한 특전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선전관 가운데에는 공신이나 재상의 자제로 임명하는 남행(南行)의 자리 2개가 종9품직으로 마련되어 있었고, 전임의 선전관으로 문신이 임명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