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초 병조는 정3품의 전서(典書)를 장관으로 하는 하위의 관서였고, 그 임무를 분담하는 속사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1405년(태종 5) 1월 병조가 정2품 아문으로 격상되면서 같은 해 3월 세 개의 속사를 아래에 두게 되었다. 이 때 무비사도 설치되어, 뒷날 『경국대전』에 오르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무비사의 직무는 군적·마적(馬籍), 병기·전함(戰艦), 점열군사(點閱軍士), 훈련무예(訓鍊武藝)·숙위(宿衛)·순작(巡綽)·성보(城堡)·진수(鎭戍)·비어(備御)·정토(征討)와 군관·군인의 차송(差送)·번휴(番休)·급보(給保)·급가(給暇)·시정(侍丁)·복호(復戶) 및 화포(火砲)·봉수(烽燧)·개화(改火)·금화(禁火)·부신(符信)·경첨(更籤) 등 매우 광범위하다.
이는 병조가 맡는 일 가운데 무선사가 맡는 무선(武選)과 승여사가 맡는 의장(儀仗)과 역정(驛程)을 제외한 군무·병갑(兵甲) 전반에 걸친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광범위한 직무의 수행을 위해 정랑과 좌랑의 낭청(郎廳)이 두어졌다. 다른 사에 비해 많은 업무량 때문에 각각 2인씩 4인의 낭청이 배당된 것으로 생각된다. 무비사의 소관사항에 대한 재결은 당상관을 경유, 최종적으로 병조판서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병조의 기능이 부분적으로 바뀜에 따라 속사제(屬司制)에 변화가 생기지만, 무비사만은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러나 종래 무비사가 맡던 일은 상당 부분이 결속색(結束色)이나 경생색(梗栍色)으로 이관되고 무비사는 군적·병기·봉수 등의 일을 맡았으며, 정랑 1인만이 배당된 것으로 『육전조례』에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