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예문관의 정9품 관직으로,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한 전임 사관(專任史官).
이칭
이칭
한림(翰林)
속칭
사관(史官)
제도/관직
설치 시기
1401년(태종 1)
소속
예문관, 춘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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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검열(檢閱)은 조선시대 예문관의 정9품 관직으로,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한 전임 사관(專任史官)이다. 본직이 왕의 교서를 짓는 일을 맡아보는 예문관(藝文館)에 속하기 때문에 본래 기능은 왕의 명령을 짓는 일이었으며, 기사관을 당연직으로 겸하였기 때문에 봉교 · 대교와 함께 전임 사관인 한림팔원이라고 불렀다.

정의
조선시대 예문관의 정9품 관직으로,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한 전임 사관(專任史官).
설치 목적

검열은 고려 후기 예문관과 춘추관이 통합과 분리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비하면서 고려의 관제를 따라 논의(論議) · 교명(敎命) · 국사(國史) 등의 일을 관장하는 예문춘추관(春秋藝文館)을 설치하고, 정9품인 직관(直館) 4명을 두었다.

1401년(태종 1) 7월에 관제를 개편할 때 예문춘추관을 춘추관(春秋館)예문관(藝文館)으로 분리하면서, 직관을 검열로 고치고 예문관에 속하게 하였다. 이때 춘추관의 전임직이 없어지자 예문관의 검열은 정7품인 봉교(奉敎), 정8품인 대교(待敎)와 함께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하게 되었다.

임무와 직능

예문관은 국왕의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서였다. 그러므로 예문관에 소속된 검열의 본래 임무도 왕의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려 후기부터 예문관과 춘추관이 통합과 분리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예문관의 관원은 녹관(祿官), 춘추관의 관원은 겸관(兼官)으로 충원하고, 예문관 관원이 춘추관 관직을 겸하면서, 예문관의 검열도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예문관의 관직 가운데 제학 이상은 다른 관사의 관원으로 겸임시키고, 응교는 홍문관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그래서 실제 예문관에 속해 있는 관원 가운데 본직은 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으로 총 8명이었다. 이들 8명이 한림팔원(翰林八員)이라고도 불리던 전임 사관(專任史官)으로 대표적인 청직(淸職)이었다.

조선시대의 검열은 대교 · 봉교와 함께 왕의 명령을 적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승지((承旨)와 함께 근시(近侍)라고 불렀다. 이들은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직하였으므로, 조정의 각종 회의와 모임에 참석하여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를 작성하였다. 따라서 검열을 비롯한 한림팔원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필요하였다.

『경국대전』 규정에 띨,면, 예문관 관직은 모두 문관(文官)을 썼으며 특히 봉교 · 대교 · 검열의 관직을 처음 제수할 때에는 의정부가 이조 · 홍문관 · 춘추관 · 예문관과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 『좌전(左傳)』 등 중국의 여러 역사서를 읽고 해석하게 하여 합격한 자를 등용하였다.

매년 6월과 12월에 실시하던 양도목(兩都目)에서 2명을 인사이동하였다. 품계가 낮은 자는 그 직위에 준하여 품계를 올려주고 차례차례 전임(轉任)시켰다. 따라서 처음 검열에 임명되면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없는 한 대교를 거쳐 봉교까지 승진하였다.

검열을 비롯한 예문관의 전임 사관들은 왕의 언행을 기록하기 위하여 왕이 주관하는 정사가 벌어지는 모든 자리에 참석하였다. 또한 왕의 행차를 따라가면서 기록을 남기고 이를 사초로 정리하였다. 사초는 검열 · 대교 · 봉교 등의 사관(史官)이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춘추관에 제출하고, 다른 1부는 사관의 집에 보관하였는데, 이를 '가장사초(家藏史草)'라고 하였다.

가장사초를 만들게 한 이유는 사초의 정리가 미비할 때를 대비한 방책이었다. 한편 검열을 비롯한 전임 사관들은 왕의 자료 조사에 응하는 일도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으므로 수시로 사고(史庫)에 출입하였다.

또한 예문관원이 관외에서 실록 편찬 자료를 운반하는 데 사용하는 궤(櫃)를 한림궤(翰林櫃)라고 하였으며, 사고에 보관된 실록이나 사초의 포쇄를 위해 예문관원이나 홍문관원에서 포쇄관을 차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검열도 포쇄관으로 자주 참여하였다.

변천사항

검열을 비롯한 전임 사관(專任史官)들은 빈자리가 생기면 후임 사관을 자체적으로 선발하는 자천제를 통하여 직무의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사관 자천제는 고려 말부터 시행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종종 신참 사관에 대한 침학(侵虐)의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30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741년 3월 유수원(柳壽垣)이 올린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계기로, 붕당정치(朋黨政治)를 혁파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자천제를 없앴다.

그리고 한림 자천제를 대신하는 한림회권(翰林會圈)을 시행할 목적으로 10조에 걸친 「한천이정절목(翰薦釐正節目)」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이 조치는 한림권점(翰林圈點), 즉 한림본관권점(翰林本館圈點)을 거치고, 도당권점(都堂圈點), 즉 한림관각회점(翰林館閣會點)을 거친 후, 한림소시(翰林召試)로 정리되어, 『속대전』에 실리게 되었다.

의의 및 평가

예문관의 기능 중 중요한 부분은 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일과 더불어 전임관이 춘추관의 사관을 겸하였던 만큼 실록의 편찬 등 국가의 공식 시행사 일체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는데, 한림팔원 가운데 4명을 차지하는 검열도 그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는 지배층의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승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시대상을 풍부하게 밝힐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經國大典)』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속대전(續大典)』
『영조실록(英祖實錄)』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단행본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일지사, 2009)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연구』(한국연구원, 2003)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연구』(국학자료원, 1998)

논문

오항녕, 「조선후기 실록 편찬 관례의 변화」(『국사관논총』 105, 국사편찬위원회, 2004)
오항녕, 「여말선초 사관 자천제의 성립과 운영」(『역사와 현실』 30, 한국역사연구회, 1998)
최선혜, 「조선초기 태종대 예문관의 설치와 그 역사적 의의」(『진단학보』 80, 진단학회, 1995)
한우근, 「조선전기 사관과 실록편찬에 관한 연구」(『진단학보』 66, 진단학회, 1988)
정구복,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87)

인터넷 자료

조선왕조실록사전(http://waks.aks.ac.kr/site/encysill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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