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2인이다. 예문관의 정8품 대교(待敎) 2인과 정9품 검열(檢閱) 4인과 더불어 ‘8한림(八翰林)’이라고 하여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는 사관(史官)이었다.
이들은 고려 때부터 사한관(史翰官)의 직임을 겸하여 평소 사초(史草)를 기록해 두었다가 실록편찬시 납입하는 책임도 지고 있었다. 봉교는 공봉(供奉)의 후신이다.
고려 때 예문춘추관에 정7품의 공봉을 둔 일이 있었는데, 공봉은 중국 고제의 한림공봉에서 연유한 것이다. 1392년(태조 1) 7월의 신반관제(新頒官制)에 있어서는 예문춘추관에 정7품의 공봉관(供奉官) 2인을 두더니, 1401년(태종 1) 7월 예문춘추관을 예문·춘추 두 관으로 분립하면서 공봉관을 개칭하여 봉교라 하고 또 수찬(修撰)을 대교, 직관(直館)을 검열이라 고쳐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이 체제는 조선 말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8한림은 사필(史筆)을 중시하여 제수방법이 일반관원과 달랐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처음 제수할 때 의정부가 이조·홍문관·춘추관·예문관과 같이 통감(通鑑)·좌전(左傳)·제사(諸史)를 강(講)하게 하여 그 중 합격한 자를 임용하였다. 성종 이후 이것을 예문록(藝文錄)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