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에 원나라에서 되찾은 영토를 원활히 통치하기 위하여 토착 세력에게 특수 관직으로 내려주었던 토관(土官)을 조선 초기 세종 때에 영토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여러 고을로 확대시키고 조직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동반 정8품 관계(官階)의 명칭을 공무랑으로 정하였다.
토관계가 처음 제정된 것은 1434년(세종 16) 4월이다. 당시 함경도와 평안도 각 고을 토관의 동서반(東西班) 자계(資階)를 정하면서 동반 정8품의 위호를 공무랑으로 정하였다. 당시 공무랑에 해당하는 직책은 함흥부(咸興府)의 영송서(迎送署) 직장(直長), 경원부(慶源府)의 지응서(支應署) 직장, 영북진의 지후서(支候署) 직장 등이다. 이어서 1436년(세종 18) 윤6월 경성부(鏡城府)에도 토관을 처음 설치하였는데, 이때 정8품 공무랑에 해당하는 직책은 영선서(營繕署) 직장이었다.
1457년(세조 3) 6월에는 경상도의 경주와 전라도의 전주에도 토관을 설치하고, 평안도 · 함길도 토관의 예에 의하여 녹(祿)을 마련하여 주도록 하였는데, 이곳 토관의 동반 정8품 자계도 공무랑으로 하였다. 그러나 경주와 전주 토관의 공무랑에 해당하는 관직은 전례사(典禮司) 승(丞)이었다. 1460년(세조 6) 4월 의주에 설치한 토관직의 동반 정8품 관계도 공무랑인데, 이곳의 공무랑 직책은 감진사(監鎭司) 부승(副丞)이었다.
그런데 이상의 조선 초기에 설치된 토관의 관계인 공무랑이 맡는 직책이 법전으로 정비된 『 경국대전』의 규정에서는 관사(管事)로 달라져서, 영흥부(永興府)는 도무사(都務司), 제학서(諸學署), 융기서(戎器署), 사창서(司倉署), 영작서(營作署)의 관사, 평양부는 제학서, 융기서, 사창서, 영작서의 관사, 영변대 도호부(寧邊大都護府), 경성도호부(鏡城都護府)는 융기서 · 사창서 · 영작서의 관사 등으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토관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공무랑 토관 관계는 『경국대전』에 수록되었고, 조선 말기인 1865년(고종 2)의 『대전회통』에도 법제적으로 존속되었다.
조선 초기에 정부는 국토를 확장하고 지방을 원활히 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토관직을 정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토관직의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토관직 운영의 통일성과 합리성을 지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