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중국에서는 주나라 이래로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국정을 총관하거나 국정을 나누어 맡은 육부의 최고 관료를 삼공육경(三公六卿)이라 불렀다. 재상부를 운영하지 않았던 명나라에서는 육부의 상서와 도찰원도어사(都察院都御史) · 통정사사(通政司使) · 대리시(大理寺) 경(卿)을 합하여 구경이라 부르면서, 구경 회의를 개최하고 군국(軍國)의 중대사를 논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최고 관직자인 태위(太尉)‧사도(司徒)‧사공(司空)과 육부의 상서를 삼공육경이라 불렀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조선 초기부터 세 의정(議政)과 여섯 판서를 삼공육경이라 하였고 삼공육경에 의정부 좌우참찬과 한성부 판윤을 더하여 삼공구경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구경은 법제적인 명문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관습적으로 삼공에 버금가는 고관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1574년(선조 7)에 선조가 경연에서 유희춘에게 구경이 우리나라의 어떤 관원에 해당하는지 묻자 유희춘은 육조의 판서와 한성 판윤 및 참찬 등이 그에 해당한다고 아뢰었다. 승정원에서 소관 사무에 대한 사례 · 규식(規式) 등을 정리하여 편찬한 『 은대편고(銀臺便攷)』에서도 육조판서와 좌우참찬, 판윤을 구경이라고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구경은 모두 동반 정2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육조의 판서는 조선 전기에 의정의 지휘를 받으면서 혹은 주도적으로 해당 조의 정사를 총관하며 국정 운영을 주도하였다. 한성부 판윤은 좌 · 우윤(左 · 右尹) 이하의 관원을 지휘하면서 도성 내의 호구 · 토지 · 치안 등과 관련된 모든 행정을 주관하였다. 의정부 참찬은 상위 관직인 좌우찬성과 더불어 의정을 보좌하고 낭관(郎官)인 사인(舍人)과 검상(檢詳)을 지휘하면서 의정부의 운영에 참여하였다.
조선 후기의 판서는 비변사(備邊司)의 제조(提調)를 아울러 맡아 비변사에서 논의되는 대소 정사에 참여하며 국정을 이끌었으므로, 대부분 종1품 관원이 행직(行職)으로 제수(除授)되었고, 심지어는 정1품 관원이 제수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 종1품인 좌우찬성과 교차로 행직에 제수되었고, 일부는 정1품 의정으로 승직(昇職)되었다. 이리하여 판서는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인 의정에 제수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직으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정2품 관직 가운데서 가장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의정부의 좌우참찬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그 지위가 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하되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의정부의 좌우참찬이 육조의 판서보다 우월하거나 대등한 관직으로 인식되었으며 국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변사가 국가의 정사와 군사에 관한 중요한 일을 총관하게 되면서, 의정부는 의례를 다루는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