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정걸(鄭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홍손(鄭洪孫)이고, 아버지는 예조좌랑 정진(鄭振)이다.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부윤 허확(許確)의 딸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전라도도사·장령·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이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선조 16)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막하로 이순신(李舜臣)·신립(申砬)·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했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그 뒤 역가문서(逆家文書) 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었다.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 곳에서 죽었다. 1599년에 복관되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