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우참찬, 병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입부(立夫)
나암(懶庵)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27년(중종 22)
사망 연도
1591년(선조 24)
본관
동래(東萊)
주요 관직
우의정|전라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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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우참찬, 병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정걸(鄭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홍손(鄭洪孫)이고, 아버지는 예조좌랑 정진(鄭振)이다.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부윤 허확(許確)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전라도도사·장령·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이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선조 16)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막하로 이순신(李舜臣)·신립(申砬)·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했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그 뒤 역가문서(逆家文書) 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었다.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 곳에서 죽었다. 1599년에 복관되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용주유고(龍洲遺稿)』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집필자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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