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효령대군(孝寧大君)의 6대손이며, 이철동(李哲仝)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광윤(李光胤)이고, 아버지는 오위장 이간(李幹)이며, 어머니는 목사 김홍(金泓)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즐겼으며,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연한이 차서 단성현감에 승배(陞拜)되었는데, 부임도 하기 전에 다시 호조좌랑에 제수되었다. 곧 하동현감으로 옮겼고, 다시 고성현감으로 전직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었다는 평가를 받아 경흥부사로 발탁되었다.
1587년 오랑캐가 녹둔도(鹿屯島)를 침공해오자 경흥부사로서 조산만호(造山萬戶)인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이를 격퇴하였으나, 군사 10명이 피살되고 106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말 15필을 잃는 등의 피해가 많았다 하여 처벌을 받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듬해 다시 오랑캐의 침입을 맞아 선봉에서 용감하게 싸운 공이 컸으므로 재서용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이 나주는 대읍이므로 문관으로 부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김해부사가 되었다.
이어 1592년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고 선조로부터 표리일습(表裏一襲: 속과 겉의 옷감을 한 벌)을 하사받았다. 이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을 일으키자 김천일을 도와 크게 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제주목사로 전직되었다.
제주목사로 재임중 병사 3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선조를 호위하겠다는 장계(狀啓)를 올려 충신으로 칭송되었으며, 섬에서 7년 넘게 근무한 공로를 포상하여 가자(加資)되었다. 1599년 1월 임지에서 순직하였다. 인조반정에 공로를 세운 아들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덕분에 완령부원군(完寧府院君)·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