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원(仲元), 사휘(士暉). 호는 오모재(五慕齋). 경주 출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 가동(家僮)을 인솔하고 토적(討賊)을 부르짖으며 의병항쟁에 앞장섰다.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족질(足疾)을 염려하여 거병을 만류하였으나, “나의 발은 비록 병들었으나 마음은 병들지 않았다. 이제 국왕이 몽진(蒙塵: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김)하였거늘 발에 병이 있다 하여 어찌 죽어서 나라에 보답하지 못하겠는가?”하고서 분연히 일어섰다.
그 뒤 각지를 전전하면서 왜군과 투쟁하다 4월 28일 다대포 진중에서 순절하였다. 1737년(영조 13) 영조가 충신의사권복흥지려(忠臣義士權復興之閭)라는 정표를 내렸다. 이를 계기로 향중의 인사들이 사우(祠宇)를 건립하였다. 1740년(영조 16) 경상도 경주에 있는 단계사(丹溪祠)[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 878 소재]에 제향되었다.
부인 서산류씨는 권복흥이 순절하자 스스로 자진한 열부였다.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식음을 전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정조는 그 뜻을 기려 1794년(정조 18) 열녀의사권복흥처서산유씨지문(烈女義士權復興妻瑞山柳氏之門)라는 정표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