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상지(尙之), 호는 월포(月浦). 증조는 대사간 강형(姜詗), 할아버지는 별제 강영숙(姜永叔), 아버지는 사인(舍人) 강온(姜溫)이며, 어머니는 진사 박식(朴拭)의 딸이다. 강사필(姜士弼)의 형이다.
1543년 진사가 되고, 1546년(명종 1)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문한직을 제수받았다. 1552년에 수찬이 된 뒤, 사간원정언 · 헌납, 의정부검상 · 사인, 홍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하고, 1557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우부승지를 거쳐서 우승지를 역임하고, 1559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이때 재해에 대한 왕의 수성(修省)을 촉구하는 소를 올린 바 있다.
같은 해 좌승지가 되고, 이듬해 도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거쳐 1561년 왕의 특별 명령으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다시 부제학이 되어 권신(權臣) 이량(李樑)의 불법을 주장하다가, 오히려 이량의 미움을 받아 부호군(副護軍)으로 좌천되었으며, 1564년 도승지로 다시 기용되었다.
다음 해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 정여창(鄭汝昌)을 배향한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의 사액을 요청해 허락 받기도 하였다. 1566년에 예조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568년(선조1) 대사헌으로 사간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조광조의 신원과 추숭을 건의하였고, 1570년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병조 · 형조 · 이조판서와 한성판윤 등을 역임하고, 1576년 우참찬을 거쳐, 1578년 우의정이 되었고, 2년 뒤 영중추부사로 옮겼다. 평상시 그는 국가의 치란이 천운에 있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정쟁에 초연한 처지를 취하였다. 아들 강인(姜絪)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