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상 ()

정정공 강사상 묘역
정정공 강사상 묘역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병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상지(尙之)
월포(月浦)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19년(중종 14)
사망 연도
1581년(선조 14)
본관
진주(晉州)
주요 관직
병조판서|형조판서|이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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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병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상지(尙之), 호는 월포(月浦). 증조는 대사간 강형(姜詗), 할아버지는 별제 강영숙(姜永叔), 아버지는 사인(舍人) 강온(姜溫)이며, 어머니는 진사 박식(朴拭)의 딸이다. 강사필(姜士弼)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3년 진사가 되고, 1546년(명종 1)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문한직을 제수받았다. 1552년에 수찬이 된 뒤, 사간원정언 · 헌납, 의정부검상 · 사인, 홍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하고, 1557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우부승지를 거쳐서 우승지를 역임하고, 1559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이때 재해에 대한 왕의 수성(修省)을 촉구하는 소를 올린 바 있다.

같은 해 좌승지가 되고, 이듬해 도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거쳐 1561년 왕의 특별 명령으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다시 부제학이 되어 권신(權臣) 이량(李樑)의 불법을 주장하다가, 오히려 이량의 미움을 받아 부호군(副護軍)으로 좌천되었으며, 1564년 도승지로 다시 기용되었다.

다음 해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 정여창(鄭汝昌)을 배향한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의 사액을 요청해 허락 받기도 하였다. 1566년에 예조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568년(선조1) 대사헌으로 사간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조광조의 신원과 추숭을 건의하였고, 1570년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병조 · 형조 · 이조판서와 한성판윤 등을 역임하고, 1576년 우참찬을 거쳐, 1578년 우의정이 되었고, 2년 뒤 영중추부사로 옮겼다. 평상시 그는 국가의 치란이 천운에 있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정쟁에 초연한 처지를 취하였다. 아들 강인(姜絪)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백헌집(白軒集)』
『대동야승(大東野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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