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은 조선 후기에 우찬성, 병조판서, 개성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66년(명종 21)에 태어나 1629년(인조 7)에 사망했다. 1589년에 생원과 진사에 입격하고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누르하치의 침입을 경고하였으며 4군에서 여진족을 철수하게 하였고 서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등 대후금정책에 기여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도원수에 임명되어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1627년 후금군을 막지 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다고 평가되고 있다.
1589년(선조 22) 생원 · 진사에 모두 합격하고 1591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 승문원의 벼슬을 거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그 뒤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 형조좌랑 · 예조좌랑 · 전적 · 직강 · 사서 · 정언 · 지평을 역임하고, 1599년 봉산군수로 나갔다.
이 때 서로(西路)에는 명나라 군사가 내왕했으므로 그들에게 급식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수령들을 결박하고 욕을 보이는 등 행패가 심했으나 그들을 잘 다스려서 도리어 환심을 샀다. 이러한 일이 조정에 전해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계(陞階)되고 동부승지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와 도승지 · 호조참판 ·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왕후의 고명주청부사(誥命奏請副使) · 세자책봉주청부사(世子冊封奏請副使)로서 두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수년 동안 안으로는 형조 · 병조의 참판, 밖으로는 전라 · 함경 양도의 관찰사가 되었다.
특히, 함경도관찰사 때에는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침입을 경고해 방어책을 세우도록 상소했고, 1610년(광해군 2) 동지중추부사로 호지(胡地)의 산천지도를 그려 바쳤다.
이듬해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나가 관서민(關西民)들이 편리하도록 군제(軍制)를 개혁하고, 여진추장에게 공첩(公牒)을 전달해 여연(閭延) 등 오래 폐지되었던 4군(郡)이 조선의 땅임을 인식시켜 들어와 사는 여진사람들을 철수하게 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호조참판으로 조정에 들어와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당시 대북의 전횡을 힐책하다가 일시 삭직되었으나 곧 승계되어 형조판서에 올랐다.
1619년 체찰부사가 되어 요동 파병에서 패망해 서쪽 국경이 동요되자 이의 무마에 힘썼으며, 왕명으로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과 함께 대후금정책을 협의하였다. 이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명정대한 공사처리가 도리어 권간(權奸)들의 시기를 받자 벼슬을 포기할 각오로 시정(時政)을 극론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병을 칭탁하고 통진으로 물러갔다. 다음해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극하자 도원수에 임명되어 원수부를 평양에 두고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해 이를 진압하였다. 이 전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임명되고 팔도도체찰사로 개성 유수를 겸했으며, 그 뒤 병을 구실로 풍덕 별서(別墅)로 내려갔으나 왕의 준책(峻責)을 받고 다시 조정에 들어와 병조판서로 도체찰사를 겸하였다.
그러나 1627년 정묘호란에 후금군을 막지 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되었으나 앞서 세운 공으로 용서받고 복관되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다 한다. 1635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통진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서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