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은 인조반정 때 공이 많았음에도 반정계획에 뒤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에 녹훈됨에 불만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변환(邊患)이 있다 하여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에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영변에 머물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이괄은 부하 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益獻) 등과 모의, 1624년(인조 2) 1월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였으나 추격하여온 장만 군에 의해 질마재에서 크게 패하고 도망가다가 부하에게 참수당하였다.
난이 진압된 뒤 그 해 3월 토벌에 따른 행상(行賞)을 3등으로 구분, 공신으로 책록하였다. 1등은 장만·정충신(鄭忠信)·남이흥(南以興) 등 3인으로 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이라 하였고, 2등은 이수일(李守一)·김기종(金起宗)·변흡(邊潝)·유효걸(柳孝傑)·김경운(金慶雲)·이희건(李希健)·조시준(趙時俊)·박상(朴瑺)·성대훈(成大勳) 등 9인으로 갈성분위효력진무공신이라 하였으며, 3등은 남이웅(南以雄)·신경원(申景瑗)·김완(金完)·이신(李愼)·이휴복(李休復)·송덕영(宋德榮)·최응일(崔應一)·김태흘(金泰屹)·오박(吳珀)·최응영(崔應永)·지계관(池繼灌)·이락(李珞)·이경정(李慶禎)·이택(李澤)·이정(李靖)·안몽윤(安夢尹)·이우(李祐)·윤회(尹晦)·김광소(金光熽) 등 30인으로 갈성분위진무공신이라 하였다.
또한 이들에 대한 특전으로 1등에게는 3계를, 2등에게는 2계를, 3등에게는 1계를 각각 올려주었으며, 1628년 왕명에 따라 공신 또는 그 적장(嫡長)에게 1계씩 더 올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