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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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
내용 요약

생원(生員)은 조선시대 소과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이다. 고려 때 국자감 승보시 합격자를 생원이라고 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소과로서 생원진사시가 설행되었다. 생원시에 합격하면 생원이라는 칭호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들은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대과인 문과를 준비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반드시 문과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생원, 진사는 음직에 나갈 수도 있었다. 관직에 나가지 않더라도 지방 사회에서 엘리트 계층으로 존경받았다. 생원은 진사와 더불어 행교나 서원 운영에 관여하였으며, 지방 사회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
내용

본래 중국에서는 생원(生員)은 국립 대학 격인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송나라 이후 현시(縣試) · 주6 · 원시(院試) 등의 시험에 합격, 주 · 부 · 현학(州府縣學)에 들어간 생도를 생원(生員)이라 하여 주3과 구별해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1109년(예종 4) 국자감에 칠재(七齋)를 설치하고 칠재생을 뽑는 승보시(陞補試)가 설치되면서 생원이 배출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승보시는 1147년(의종 1)에 제도화되어 1369년(공민왕 18)까지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1369년 이후 승보시는 생원시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는데 『고려사』 선거지에 ‘승보시즉생원시(陞補試卽生員試)’라고 기록한 데서 확인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는 과거제의 하나로서 소과인 생원시를 설치하고 그 합격자를 생원이라 하였다. 이 제도는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고종 31)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진사(進士)와 더불어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다시 문과(文科)에 응시, 합격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당시 유생들이 밟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고 참봉 · 훈도 · 주4 등 종9품직에 제수되는 경우도 있었다. 생원은 진사와 더불어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가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수시로 실시하는 증광시(增廣試)의 소과(小科)에서 각각 100인을 뽑는 것이 정식이었다. 조선시대는 1894년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식년시가 162회, 증광시가 67회 총 229회의 소과가 시행되었다. 조선 후기 특히 고종 연간에는 한 번에 100명 이상의 생원을 뽑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배출된 생원수는 2만 4,00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 중 문과에 진출한 수는 불과 3,000명을 밑돌아 하급 관리로 진출한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대부분 생원이라는 신분으로 각 지방에서 일정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군역(軍役)이나 잡역(雜役)을 면제받았을 뿐 아니라 지방 사회에서 지식인 계층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한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였다. 특히 대부분의 지방 사족이 관직 진출이 어렵게 된 조선 후기에 더욱 그러했다. 생원은 진사와 더불어 향교서원 운영에 관여하였고, 지방 사회 여론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사마소를 건립하여 모임을 가졌으며, 사마안을 작성하여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다.

생원과 진사와의 관계는 법제적으로는 우열이 없으나, 조선 초기는 생원이 진사보다 우대를 받았는데, 조선 초기의 경학(經學)을 중시하는 학문 경향 때문이었다. 국초에는 사장(詞章)에만 힘쓰게 된다고 하여 진사시를 설행하지 하고 생원시만 설행하였다. 세종 때에 주5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하여 1438년(세종 20) 진사시가 설행되기 시작하였으나, 여전히 경학을 중시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성균관 유생의 주2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생원의 말석에 진사가 앉도록 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내려오면 경학보다 사장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지방에서도 경학보다는 제술에 치중하여 생원보다는 진사를 원하였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도 진사라고 말하는 사례까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태학지(太學志)』

단행본

송준호, 『이조생원진사시의 연구』(국회도서관, 1970)
허흥식, 『고려과거제도사연구』(일조각, 1981)

논문

김경용. 「'사학과시' 출신자의 생원 . 진사 진출실태 분석 -1846년 식년생원진사시를 중심으로」(『교육사학연구』 28-1, 2018)
이수환, 「조선향촌사회 속의 생원, 진사」(『한국사시민강좌』 46, 일조각, 2010)
이홍렬, 「사마시의 출신과 방회의 의의」(『사학연구』 21, 한국사학회, 1969)
조좌호, 「李朝司馬試考」(『성균관대학교논문집』 14·16, 성균관대학교, 1969)
최진옥, 「15세기(世紀) 사마방목(司馬榜目)의 분석(分析)」(『청계사학』 5, 청계사학회, 1988)
최진옥, 「생원 진사시와 서울의 과거 풍속」(『향토서울』 67, 2006)
주석
주1

이수환, 「조선향촌사회 속의 생원, 진사」, 『한국사시민강좌』 46, 2010, 121~128쪽.

주2

좌석의 차례. 우리말샘

주3

중국에서, 국자감에 속한 대학생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4

조선 시대에, 오위의 군사를 거느리던 장수. 종이품의 관원으로 12명을 임명하였는데, 임진왜란 뒤에 정삼품으로 하고 인원도 15명으로 늘렸으나 실권은 훈련도감에 빼앗겼다. 우리말샘

주5

시나 글을 지음. 우리말샘

주6

중국 명나라ㆍ청나라 때 과거 제도의 한 단계인 예비 고시. 지부(知府)가 주관하였으며, 고시에 합격한 사람을 동생(童生)이라 하여 원시(院試)에 나아갈 자격을 주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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