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 ()

제도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
개설

국도(國都)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에 이루어졌다. 고려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3경(京) 12목(牧)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향학(鄕學)의 시초이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건립된 최초의 향학은 서경의 학원(學院)으로 그 뒤 1003년(목종 6)까지는 최소한 3경 10목에 향학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향학을 곧 향교의 전신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인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州)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고, 각 군현에 학교가 설립된 여러 사례들이 나타남을 감안할 때 이 시기를 향교의 성립기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향교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검토가 요청된다.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수준에 도달한 고구려가 왕경에 태학(太學)을 두어 유학을 가르쳤다든지, 이어 백제가 박사를 두고 신라가 대학(大學)을 세웠던 사실은 새로운 정치이념과 권력구조의 모형을 유교 속에서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뒤 통일신라기를 거쳐 고려에 이르면 지금까지 상징적 기능만으로 이해되던 유교적 이념과 유교적 정치구조의 내용이 새로운 시대의 지표로 인식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고려 초 왕건(王建) 이후 역대 고려왕들은 이 새 정치이념인 유교를 새 사회의 질서의 근간으로 하여 정치권력구조를 조직하려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추세 가운데에서 왕경이나 왕실의 정치구조뿐만 아니라, 기층사회까지 유교이념을 침투시키려는 정치의지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구현하는 기구로 향교제도의 필요성이 증대된 것이다.

이러한 하향적인 통치방향과 함께 신라 말 고려 초에 등장한 지방호족들의 정치·사회활동에 대한 일정한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유교였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학원을 세워 유교를 교육하였다. 즉 5소경에 이른바 학원의 설치는 하향적 관제체제 속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호족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설립, 운영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 학원은 지방사회 내부에서 자기발전의 도구로서 유학교육의 필요가 절실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하에서 파악할 때 향교는 상향적·하향적 요구의 합치점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향교는 상향적 역사운동에서 나타난 측면보다는 하향적 운동과정에서 형성된 교육기관으로 파악함이 타당하다.

정치권력이 기층사회에 침투하려는 구체적 역사현상은 군현제가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따라서 향교는 군현제의 운영과 함께 이해되는 것이 그 실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군현제의 운영은 후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수의 군현이 속현(屬縣)의 상태로서 외관(外官)이 부재한 상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군현제 운영의 부진상은 향교운영에도 동일한 문제점을 노출하는 것이었다.

성종 때 12목에 외관의 파견과 함께 경학박사·의학박사를 파견하였던 것은 지방교육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나 아직 완벽한 지방교육제도가 정착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향교의 적극적인 유학교육의 면모를 우리 역사에서 나타내는 것은 조선에 이르러 군현제의 재정비와 강력한 운영이 실시되던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향교교육은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거제도는 유학교육의 성과를 수렴하는 제도라고 할 때 지방에서의 유학교육도 과거제도와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의 과거제도에는 향공(鄕貢)이라 하여 지방에서의 천거가 있었다.

이는 개경과 함께 지방에서의 교육의 실상을 시사하는 것이고, 특히 인종 이후 강화된 향학운영의 자료는 지방군현에서의 유학교육의 면모가 일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려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본다면 향교교육의 실태는 군현제의 강화와 함께 실시되는 조선시대의 향교제도와 비교할 수 없는 저조한 수준이다.

고려시대에 하향적 교육정책, 즉 교화적 정책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유학교육기관으로서 향교의 실상은 오히려 고려의 사사로운 기구에 의해서 운영되는 교육적 성과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향교는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정책적으로 그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향교의 전반적 설명은 조선왕조에서 전개된 역사상을 중심으로 설명되어진다.

재정

향교의 운영을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적 지원이 요구된다. 향교의 교사(敎舍) 등 시설물의 설치·보수·유지, 교수관(敎授官)의 후생비, 교생들의 숙식비, 학업활동에 부수되는 제반비용, 그리고 향교를 중심으로 준행되는 석전례·향음례 등에 이르는 비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조선왕조는 막대한 재정투자가 요구되는 향교를 각 군현에 세우고 유학교육의 실시를 위해서 이른바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를 공급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숭유억불적 정책을 살펴볼 수 있다.

태종과 세종연간에 지급된 학전과 학노비의 내용은 〔표 1〕 과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전(禀田과 祭位田 포함)과 학노비가 향교운영에 적정한 수준인가는 알 길이 없다. 서울인 한성에 사부학당의 교사가 세워지고 사학(四學)으로서의 체제가 잡혀진 것이 1430년(세종12) 8월경으로 그 이전에는 사찰(寺刹)을 빌려 교육하였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향교가 독립건물을 세우고 학교를 운영하는 데 태종연간에 지급된 국가의 재정적 지원의 규모는 실제 소요되는 선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표1] 향교의 학전과 학노비

구 분 학전[學田, 결(結)] 학노비[學奴婢, 구(口)]
태종 세종 성종 태종13년 태종17년
양전(襄田) 제전(祭典)
유수관(留守官) 50 6 15 10 20 30
대도호부(大都護府)·牧(목) 40 4 10 10 15 25
도호부[都護府, 유(有)] 15 4 4 10 10 20
도호부[都護府, 무(無)] 10 4 4 10 10 20
군[郡, 유(有)] 15 4 4 7 7 15
군[郡, 무(無)] 10 4 4 5 7 15
현(縣) 10 4 2 5 5 10
개성부(開城府) 20 6 20
주 : 1) ( ) 안의 유·무는 육교수관(有敎授官)·무교수관(無敎授官)임.
2) 태종 6년 윤7월에는 도호부에 품전 15결씩 가급됨.

뿐만 아니라 교수들의 후생문제, 학생들의 숙식문제, 그 밖에 학교의 운영문제를 감당할 수 있었느냐는 이들 학전으로 충당하였는지는 의문스럽다. 특히 초기 학전의 운영방식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즉 초기에 학전의 경우는 과전법(科田法) 운영방식을 따랐다면 수조(收租)를 통해서 그 재정수요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향교운영의 책임을 지는 주체는 수령이었기에 향교의 독립적 운영에 타격이 컸으리라 추측된다. 수령의 책임 아래 운영되는 향교는 자연히 수령의 개별적인 행정능력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이상 향교에 대한 재정지원을 외면할 형편은 아니었다.

이에 1484년(성종 15)에는 「제읍향교급전절목(諸邑鄕校給田節目)」을 제정하였고, 이것이 토대가 되어 1492년에 반포된 『대전속록(大典續錄)』의 호전(戶田)·학전조에는 성균관을 비롯해서 주·부·군·현 등에 각각 400결·10결·7결·5결씩을 지급하여 수세(收稅)하여 그 재정수요를 수령에게 검색하도록 하였다.

향교의 재정은 개국 초로부터 향교에 급여된 위토(位土) 전답의 수세 외에도 지방관이 분급한 전곡 및 요역(徭役) 그리고 향교에 비축된 전곡의 식리로 충당되었다.

향교가 소유한 전토는 지역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언양향교(彦陽鄕校)의 경우 1895년(고종 32) 당시 답(沓) 69두락의 위토를 소유하였고, 안의향교(安義鄕校)는 1788년(정조 12) 당시 전답은 7결 77부(負)를 소유하는 등 지역 및 향교별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학위전(學位田) 이외의 수입원으로는 모군(募軍)의 대납전(代納錢), 어장의 망세(網稅), 그리고 향교경비의 보충을 위하여 별도로 마련한 섬학전(贍學田)·광학전(光學田) 등 기금의 이식이 있었다.

그 밖에도 중건·중수의 공역이 있을 때에는 관청에서 그 비용을 지급하였고 필요하면 유전(儒錢)을 갹출하거나 그 지방 유지의 보조를 받기도 하였다. 향교에서 지출되는 비용의 세목은 춘추 석전(釋奠)의 제수(祭需)와 교임(校任)의 공궤(供饋), 백일장과 과거응시에 참가하는 유생에 대한 조전(助錢), 교복(校僕) 등의 삭료(朔料)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교관

『경국대전』에는 교수관을 교수(敎授, 종6품)와 훈도(訓導, 종9품)로 구분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군현은 약 330여개 소에 달하였으나 수령을 파견하기에도 어려운 실정이었던 조선 초기에는 교수관의 충원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정식 관인이 아니면서 교수직을 감당하는 자들은 교도직(敎導職), 또는 학장(學長) 등의 이름으로 재지(在地) 신분의 생원·진사 중에서 선발하여 충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제상 교수관으로 부임을 하여야 하는 도호부 이상의 군현의 교수관은 문과 급제자들 중 삼관[三館 : 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승정원(承政院)]의 권지(權知)들로 교수관을 보임하였다. 또는 시기가 좀 늦은 경우이기는 하지만 문신좌천자(文臣左遷者)로 보임하기도 하였다.

훈도 또는 학장 등도 생원이나 진사, 최악의 경우는 지방에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보임시켰다. 그러나 조선 전기부터 향교교관의 확보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 이유는 문과에 합격한 자가 지방의 교관직에 부임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원·진사들도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행정관료로 진출하는 것을 희망하였고 교도직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태종·세종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교관직에 대한 유인책과 논공행상의 방책을 제시하였으나 교관직에 대한 기피현상은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중종 때에는 일경(一經)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군역을 면하려는 방편으로 교관직에 머무르는가 하면 명종은 어느 정도의 학식이 있는 자가 있으면 사회적 신분에 관계하지 않고 학장으로 임명하는 교육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교수관의 배치는 교육적 차원에서 시행되는 예가 허다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가면 보다 관료적인 기능의 교관이 나타나기도 한다. 즉 1586년(선조 19)에 보이는 제독관(提督官) 혹은 교양관(敎養官)이라고 하는, 교수관보다 더 관료적인 교관으로서 계수관(界首官)에 해당하는 관원을 도나 향교에 파견하여 향교교육을 독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향교교육은 관료적 범주 안에서 정상화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인식하였던 조선왕조는 교육기능을 담당하는 교관을 포기함으로써 관료적인 교육정책을 마무리짓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영조 때의 『속대전』에서 향교의 모든 교관은 없어지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관료적 조직으로 유교교육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이에 따라서 유능한 학도들은 강학능력을 상실한 향교를 멀리하고, 서원·서당·정사 등 사학기관을 찾게 되었다.

향교는 이제 문묘의 향사를 하는 관학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였고, 지방 양민들의 군역을 피역하는 장소로 전락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향교의 강학기능을 회복하고자 지방관은 따로 양사재(養士齋)·흥학재(興學齋)·육영재(育英齋) 등을 향교 부속으로 건립하기도 하였고, 1886년에는 향교의 재정으로 관학원(官學院)을 설립하도록 지시하여 3인의 훈장을 두고 강학에 임하도록 하였으나 그 성과 및 지속기간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다.

교생

조선이 신분제 사회임을 전제한다면 향교에서 유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의 사회적 신분은 명백해진다. 즉 16세기에 오면 “향교에는 군역을 담당할 농민, 즉 양민들이 교생이 되고 있어 교생들에게 주어지는 면역(군역)의 혜택을 받고자 하니, 양민들 중 교생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비등한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의 양반의 신분만이 향교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상식적인 논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유교교육은 양인(養人)과 교화라는 양면적 목표를 가지고 집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는 개국 초부터 국역의 대상이 되는 신분이라도 누구나 독서를 원하면 향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세종 때에 신백정(新白丁)에게 향교입학을 허락한 것이나 조선 초기부터 자주 보이는 농민들에게 향교교육을 허락한 점은 그러한 반증이다.

16세기에 와서 실록자료에 ‘교생은 양반이어야 한다.’는 논리의 주장이 보이는 것은 이 시기에 조선왕조의 신분제적 편제가 강화되는 것을 배경으로 상위신분의 양반이 유교교육에 보다 전력하여야겠다는 명분적인 뜻이 강한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양반신분층의 배타적인 교육기회의 독점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생들의 사회적인 신분은 개국 초부터 이른바 양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으며, 16세기 이후 강화 양반신분 중심의 사회체제 속에서도 교생은 평민들이 상당수 점유하고 있었다. 이른바 동재(東齋)·서재(西齋)로 기숙사의 구별을 나타내기도 하고, 액내(額內)와 액외(額外)로 양반과 평민 교생들을 구분하였다.

일단 교생이 되면 그들의 사회신분이 양반이건 평민이건 법제적으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군역의 문제라든지, 과거시험을 응시하는 자격을 얻는다든가 하는 점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즉 향교에서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생원·진사시험 회시에 직접 응시하는 특전을 부여받거나 일강(日講)·월과(月課)에 우등한 자는 호역(戶役)을 면제받는다든지 할 때, 다만 교생이라는 신분만이 요구되는 것이지 양반이냐 평민이냐는 문제되지 않았다.

다만 교생들의 신분구성이 다양하였던 관계로 나중에 그들의 직업선택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생원·진사시험에 응시하는 것에서부터 역학생도(譯學生徒)와 각사(各司)의 이서직(吏書職)에 이르는 다양한 직종으로 진출하는 길이 있었다.

개국 초에는 교생의 정원은 부·대도호부·목에 50명, 도호부에 40명, 군에 30명, 현에 15명으로 배당되었으나, 『경국대전』에는 이것이 증액되어 각각 90명·70명·50명·30명으로 재조정되어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교생의 정원은 법적으로 16세부터 국역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기준이 되는 숫자이다.

따라서 16세 미만인 경우 정원에 관계없이 향교에서 교육이 가능하며 이들이 이른바 ‘동몽’들이다. 교생들의 교육연한은 일정한 기간이 정해진 것 같지는 않다. 군액(軍額)의 대상이 부족할 경우는 연령의 상한선을 20세까지 제한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40세까지는 향교에 머무르며 학생신분을 허락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교육과정

향교는 시문(詩文)을 짓는 이른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을 교과내용으로 한다. 경학은 경전뿐만 아니라 사서(史書)를 함께 공부하였다.

이렇게 관인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향교교육의 내용은 제도적으로 과거제와 일정한 관계를 갖도록 되어 있었다. 향교에 일정기간 출석한 자에 대하여 과거 응시자격을 부여하는 원점법(圓點法)의 적용이 그 예이다.

또한 향시의 예정 합격인원을 도별로 제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표2〕는 향시의 도별 합격예정자의 수와 향교의 정원수를 대비한 것이다. 〔표2〕와 같이 서울과 지방과의 향시 합격률에는 차이가 난다.

[표2] 향시의 합격예정자수 및 향교정원

구 분 관시(館試) 한성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평안 황해 함경
합 격
예정자수
문과시
생원시
진사시
50 40
200
200
20
60
60
25
90
90
25
90
90
30
100
100
15
45
45
15
45
45
10
35
35
10
35
35
240
700
700
향 교 정 원 200 400 1,770 2,100 2,350 2,870 1,240 2,160 1,140 1,320 15,330
주 : 1) 한성부의 향교 정원은 4부학당의 정원임.
2) 각도의 향교정원은 경국대전과 각 군현의 향교 정액을 토대로 산출한 것임.

서울의 4부학당 정원 400명에 생원·진사 초시 합격예정인원 400명은 100%합격을 보이고 있는 반면에 각도 향시의 경우는 7%내외의 저조한 합격률을 보여준다. 향교가 관인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기능이 있다고 해도 그 문호라는 것은 지배신분인 양반 신분이 집중되어 있는 한양과는 그 격차가 큰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은 또한 기층신분인 평민들에게 교육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향교의 교과과정은 생원·진사의 시험과목을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는 생원초시의 시험과목이 오경의(五經義)·사서의(四書疑) 2편(編)이며, 진사초시에는 부(賦) 1편, 고시(古詩)·명(銘)·잠(箴) 중 1편을 짓게 되어 있다. 복시(覆試)의 경우도 초시의 것을 되풀이한다. 사장(詞章)인 제술(製述)과 경학공부를 병행하도록 시험이 출제되었던 것으로 보아, 향교교육도 이에 준하였을 것이다.

또한 세종이 “15일 동안은 시문을 제술하고 15일 동안은 경서와 제사(諸史)를 강독하게 하며, 제술과 강론에서 우등한 자는 5인씩 녹명(錄名)하여 예조에 보고하여 바로 생원회시에 응시하게 한다.” 고 한 자료는 대체로 향교교육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경국대전』 장려조에는 “교생으로서 독서한 일과를 매월말에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관찰사가 순행하여 고강(考講)하고, 영에 따라 권장함을 문부(文簿)에 기록하였다가 교관이 전최(殿最)할 때에 그의 월과·일강을 빙고하여 우등한 자는 호역(戶役)을 헤아려 감한다. ”는 내용을 통해서도 향교에서의 공부내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찰사의 고강에 낙강한 교생은 교생신분을 박탈당하였다.

양란 이후에 등장한 납속면강첩은 고강을 통하여 교생으로부터 박탈되는 것을 납속으로 면제받고자 한 것이었다. 한편 교생들이 강습한 교재는 『소학』, 사서오경을 비롯한 제사와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으로 성균관이나 서원의 그것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학』과 『가례』는 조선 초기부터 교생들에게 권장된 책으로서, 각종의 고강이나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부과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향교는 교육용 서책의 부족을 심하게 겪었고, 이는 향교교육 자체를 곤란하게 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건물의 구성과 배치

향교의 배치는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지고, 이 밖에 일부 변형된 방법들도 쓰이고 있다. 향교가 자리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는 전면이 배향공간이 오고 후면에 강학공간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그러나 밀양향교(密陽鄕校)에서처럼 동쪽에 강학공간을, 서쪽에 배향공간의 두는 예외적인 배치법도 있다. 평지에 건축된 나주향교(羅州鄕校)의 배치와 평면을 살펴보면, 이는 전묘휴학의 배치로 남쪽 정문인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배향공간의 중심으로 출입하는 정문인 내삼문(內三門)까지 직선의 길이 나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성전(보물, 1963년 지정)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대성전에는 공자(孔子)의 위패를 비롯하여 4성(四聖)과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일반적으로 향교에서는 대성전 앞, 동과 서 양쪽에 공자의 제자들과 현인들의 위패를 모시는 동무와 서무가 건축되나, 이곳에서는 그 자리만 남아 있다.

대성전 뒤로는 담장을 쌓아, 그 뒤쪽에 있는 강학공간과 구분하였고, 대성전과는 동쪽 모서리에 만든 샛문으로 출입하고 있다. 강학공간은 대성전의 중심축상, 제일 안쪽으로 중심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을 두고, 그 앞 동쪽과 서쪽에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동재와 서재를 두고 있다. 명륜당은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심건물을 두고 그 양쪽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되는 건물을 약간 사이를 띄워 건축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좌우대칭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반으로 전면 반칸은 툇마루이고 나머지는 모두 온돌방이다. 동재 앞쪽에는 비각이 있고, 동쪽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림을 맡아 해주는 교직사(校直舍)가 자리잡고 있다.

다음으로 구릉지에 건축되어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는 영천향교(永川鄕校)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쪽 제일 앞쪽으로 누문인 풍화루(風化樓, 정면 3칸, 측면 2칸 중층)가 있고, 이 누의 아래층에 낸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쪽에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큰대청(정면 3칸·측면 3칸)을 두고 그 좌우 양쪽으로 온돌방(1칸×3칸)이 하나씩 있다.

동재와 서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대청(1칸×2칸)과 온돌방(1칸×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륜당 뒤쪽 높은 곳에는 내삼문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배향의 중심전각인 대성전이 서 있으며 그 앞 동서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으며, 동무와 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밀양향교에서는 외삼문을 들어서서 동북쪽으로 진입하면 풍화루가 자리잡고 있고, 이 누의 아래층에 있는 삼문을 통하여 명륜당 마당에 이른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는 온돌방(1칸×1.5칸)을 하나씩 두었으며 앞에 반칸 너비의 툇마루를 두었다.

명륜당 남쪽 동서 양쪽에는 동재와 서재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남쪽에서부터 마루(1칸)·온돌방(2칸)·대청(2칸)·온돌방(1칸)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향공간은 명륜당 뒤쪽에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명륜당 서쪽 터에 있어 명륜당 앞마당을 돌아 들게 되어 병렬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의 정문인 대정문은 정면 9칸 측면 1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는 회랑에 삼문을 만들어 강릉향교의 대성전에서와 유사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 정면 높은 터에 남향한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통간이며 이의 앞쪽 동서로 자리잡은 동무와 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향교의 배치는 평지에서는 전묘후학이고 구릉지에서는 전학후묘가 일반적이나 때로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이 나란히 배치될 때도 있다. 또 각 건물의 평면을 살펴보면 강당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두며, 동재와 서재는 온돌방과 대청 또는 온돌방만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성전과 동·서무는 통간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며 내부의 바닥은 전바닥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배향공간과 강학공간 이외에 향교의 살림을 맡는 교직사는 부엌·방·대청·광 등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일반 민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공간은 강학공간과 가까이 배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존경각(尊經閣)은 방형(方形)의 단일평면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고 때로 동무나 서무의 한 곳을 존경각으로 할 때도 있으며, 이 때에는 존경각이라 하지 않고 경판고(經板庫)라 부른다.

향교건축의 구조양식은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 개별 건물들이 일률적으로 하나의 건축구조양식을 이루지 않고 대략 세 가지 양식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주심포(柱心包)양식, 익공(翼工)양식, 그리고 민도릿집양식이 일반적으로 대성전은 주심포양식(예 : 강릉향교대성전·장수향교대성전·나주향교대성전)과 익공양식(예 : 안성향교대성전·온양향교대성전)으로 나누어진다.

동무와 서무는 익공양식이 주류를 이룬다. 다음 명륜당은 익공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동재와 서재는 익공양식과 민도릿집양식으로 건축된다. 한편 교직사는 일반주택과 같은 공간구성을 하고 있는 만큼 민도릿집양식을 이루고 있으며 존경각은 익공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상에서 고찰한 주심포·익공·민도릿집 등의 기둥구조양식 이외의 다른 구조상의 요소들, 즉 기단·초석·창호·지붕 등은 모두 어떤 일정한 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각마다 다양하게 구성됨으로써 일반 건축물에 나타나 있는 모든 양식들을 볼 수 있다. 향교는 선현의 배향과 학생의 교육인 강학을 기능으로 하는 만큼 이 두 공간이 전체에서 핵심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들 두 공간 중에서도 선현의 배향공간을 우위에 둠으로써 대성전이 항상 명륜당보다 우위의 위치에 오는 것은 사학(私學)의 서원에서와 같다.

그러나 서원에서는 평지라 하더라도 대성전에 해당되는 사당을 대지의 가장 안쪽에 두어 신성시하는 것과는 달리 향교에서는 그것을 강학공간의 앞쪽에 두어 전체 공간에 있어 우위에 있게 하고, 구릉지에서는 반대로 강학공간보다 높은 터에 두어 고저 차이로 우위에 있게 하는 것이 특색이다.

또 배향공간을 우위에 두는 방법은 배치에서뿐만 아니라 구조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즉 대성전은 주심포건축이 주류를 이루고 명륜당은 익공건축이거나 민도릿집 계통인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또 배치에 있어 중심공간이 배향과 강학의 두 공간은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균형을 이루어 공간에 어떤 위엄을 가지도록 한 것이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사찰배치가 비좌우대칭균형을 이루는 것과 다른 점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때에는 역시 비대칭균형을 이룸으로써 우리 나라 전통건축의 공통적인 배치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향교는 1900년에 창설된 오천향교(鰲川鄕校)를 끝으로 231개의 향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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